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 6 호텔
3층 벽돌건물로 오인 복원주장 큰 우려
▲ 1889년 1월 미국 잡지 '하퍼즈 위클리' 에 소개된 대불호텔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사> 제44권은 커피의 도입과 관련해 "1892년 구미 제국들과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커피를 전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왕가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관에 있는 동안 익숙해져 아주 좋아했다"고 전한다. 더불어 손탁 호텔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다.

"1902년 손탁 여사가 고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자리에 서양식 호텔을 개업했고, 이곳에서 처음 커피를 팔았다."고 해 마치 손탁 호텔에 의해 커피가 국내에 전해진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 같은 기술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호텔인 인천 '대불(大佛)호텔'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데서 비롯된 오기(誤記)라고 생각된다.
선교사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대불호텔에 투숙했다. 그는 선교보고서에서 "대불호텔 방은 편안할 정도로 컸지만, 더웠다. 서양음식이 잘 마련돼 있었고, 입에도 잘 맞았다."고 했다. 그때 '양탕국(커피의 별칭)'을 맛보았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데, 황제가 먼저 커피를 마셨다는 서울 위주의 기술이 아직도 횡행하고 있다.

그처럼 지역사를 무시하고 있는 경우가 한둘이 아닌데, 이번에는 인천에서 자생적 오류까지 범하고 있는 중이다. 1888년에 신축한 3층 벽돌 건물을 '아펜젤러 목사가 묵은 국내 최초의 호텔'이라는 주장과 함께 관광 진흥을 빌미로 사진엽서와 목측으로 그린 평면도 서너 장을 근거로 삼아 이를 복원하자는 것은 큰 문제이다.

주막집이 고작이었던 시절, 숙박문화에 일대 혁신을 보여준 대불호텔의 의의는 적지 않다. 그러나 위치도 다르고, 제 건물도 아닌 것을 '최초'라며 '복원'하자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이 경우, '역사적 기억'으로서 남겨두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창작'할 수는 없다. 역사에 개칠을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