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6> 민족운동의 터전 '웃터골운동장'
▲ 웃터골운동장에서 열린 학생체육대회.
▲ 한용단.
이제 곧 45억 아시안의 잔치인 2014인천아시아경기대회가 막을 연다. 인천은 축구·야구 등 근대 스포츠의 전래에 있어서도 한국 최초의 도시였고 서울보다 6년 앞서 만들어진 '웃터골운동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운동장'일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4차례의 전국체전을 치뤘던 '인천종합경기장' 시대를 거쳐 2002년 월드컵 16강의 신화를 이뤘던 '문학경기장'과 2013년 5번째였던 94회 전국체전을 끝내고 이제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새로운 스포츠의 역사를 쓸 예정이다. 이 모두가 인천의 오랜 역사적 경험에서 연유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 스포츠의 전래
1883년 인천의 개항은 조선에서 3번째였지만, 앞 시기 부산(1876)과 원산(1880)의 개항과는 그 역할과 비중을 달리했다. 서울로 진입하는 최단거리라는 지리적 입지로 인해 신문물은 인천을 통해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인천은 최고 최초가 많은 도시로 탈바꿈하게 됐다. 근대 스포츠의 전래에 있어서도 인천이 자주 거론되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야구·축구 등 구기 종목은 선교사나 무역 상사원들에 의해 이곳에서부터 전국 각지로 빠르게 전파됐던 것이다.

인천이 개항하기 한 해 전인 1882년 영국군함 플라잉피쉬(The Flying Fish)호가 한·영수교 이후 수로 측량을 위해 인천항에 들렀을 때 수병들이 상륙해 축구경기를 벌였다고 하는데, 그 장소가 웃터골운동장이었다고 회자되고 있다. 그들은 잉글랜드 출신답게 무기와 식료품에 더해 축구공까지 싣고 동아시아로 온 것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시합을 한 곳이 이곳이라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야구가 전파된 것은 1901년으로, 이보다 2년 앞선 1899년 일본인 학생들이 인천에서 '베이스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했다고 했는데, 당시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 웃터골 아래 전동(典洞)이었던 것을 감안해볼 때 경기장은 인근의 분지였던 웃터골운동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웃터골운동장은 시내 어디에서나 쉽게 올려다볼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분지였다.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이곳은 러일전쟁 당시 철도감부(지금의 철도청)의 합숙소가 됐다가 인천부의 소유가 된 땅으로 골짜기 전체가 작은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자연스레 인천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공간이었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일제의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바뀌게 되는데, 언론 출판의 허가와 한글의 사용, 집회·결사를 허용했지만, 그 내면을 보면 한국인의 민족운동을 겉으로 드러내게 한 연후 거기에 맞춰 통제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인천은 개항 이래 일본인의 진출이 많았었고 일제강점기에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인천의 조선인들은 유독 민족적 차별에 신음해야 했고 일제의 경계는 더욱 교묘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산근정(山根町) 공설운동장이라 하기도 했지만 인천에 공설운동장이 최초로 세워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천 체육의 메카
분지 형태의 '웃터골'이 보다 구체적인 운동장의 모습을 갖추며 확장된 시기는 1920년으로 사회 전반의 유화적 분위기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인천부는 조선체육협회와 용산철도 야구부의 협조로 기존의 웃터골을 고르게 닦고 넓혀 이해 11월 인천의 공설운동장을 조성했는데 이것은 서울의 경성 공설운동장보다 6년이나 빠르게 건립된 것으로 실로 한국 최초의 공설운동장이었다. 시설의 규모면에서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한국 최초로 등장한 실험적 체육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이때를 계기로, 독립을 위한 정신적 단결과 체력 배양을 위해 운동회를 개최하고 체육단체를 조직했다. 해마다 여는 춘(春)·추(秋)의 각 학교 대운동회와 연합체육제전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망국의 한을 스포츠를 통해 강인한 체질로 바꿔 보자는 식의 캠페인도 등장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인의 건장한 체형에 대해 "중국인들과도 일본인들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더 잘생겼고, 한국인들은 일본인에 비해 훨씬 체격이 좋다"고 했다. 조선인은 스포츠 분야에서 일찌감치 강세를 드러냈다. 특히 일본인들과의 경기는 질래야 질수가 없고 져서도 안되는 것이 식민지 조선의 한국인이었다.

인천의 웃터골운동장은 그저 단순한 스포츠 경기장이 아니었다. 고단한 식민지 민중의 쉼터이면서 울분을 삭이던 곳이었다. 이 시대를 풍미하던 한용단(漢勇團)은 서울의 양정이나 배재, 중앙, 휘문 등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경인철도를 타고 한강(漢江)을 오가며 국권회복에 대한 염원을 모아 만든 조직으로, '한강(漢江)을 오가는 용맹한 인재'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인천의 희망이었고 미래의 등불이었다. 이들의 경기가 있을 때면 온 인천이 들썩거렸던 이유였고, 웃터골운동장은 일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천 조선인들의 환호와 감동, 한풀이와 단합의 자리가 됐다.

웃터골운동장은 한국체육의 성지이고 인천체육의 메카였다. 이후 1936년 인천공설운동장으로 이전하기까지 각종의 야구, 축구, 육상 경기는 물론 각 학교의 대운동회가 연중 끊임없이 열렸다. 그곳은 인천의 애국 투사들을 육성한 곳으로 광복이 올 날을 기다리는 인천 시민들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한국 근대스포츠의 개척지였던 인천에서 다민족 다문화의 스포츠 축제가 열리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제17회 2014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통해 인천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