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5> 인천 선사인의 삶의 발자취, 고인돌
▲ 학익동 고인돌.
▲ 강화 부근리 고인돌.
인천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이미 한반도 서해안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 고인돌 무리를 비롯해 남구 문학, 주안 및 서구 대곡동 등 인천지역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고인돌들은 이를 말하고 있다.

▲고인돌 출현, 사회변화와 분화의 흔적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선돌(立石), 열석(列石), 환상열석(環狀列石), 석상(石像), 돌널무덤(石棺墓)과 함께 거대한 돌을 이용해 축조한 거석기념물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수가 분포한다. 고인돌은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하는데, 지석묘라고도 한다.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고 있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墓標石) 또는 종족·집단의 모임장소, 의식을 행하는 제단(祭壇)이나 혹은 기념물로도 이해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은 시베리아 거석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북방설, 동남아시아에서 왔다는 남방설, 그리고 한반도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자생설 등이 있다. 그 상한연대도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돼 청동기시대에 주로 만들어지다가 철기시대에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대규모의 고인돌이 출현한다는 것은 분화된 계층과 지배자가 등장하고 조직화된 사회가 발달하는 시대의 변혁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
고인돌은 거의 국토 전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대체로 서해·남해의 연안지역과 큰 하천의 유역에 주로 분포돼 있다. 특히, 전라도와 황해도에 가장 밀집돼 있다. 동해지방으로 가면 그 분포가 희박해지며 산악지대에서 가끔 발견되는데 이들의 위치는 서해로 흘러가는 강줄기 근처로 서해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인돌들이 분포하고 있는 상황은 무리를 지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대부분 5, 6기 내지 10여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100~200여기씩 무리를 지어 있다.

현재 고창·화순·강화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데, 남북한에 분포한 고인돌의 총수는 적어도 5만기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북한에는 2만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은 전라남도 일대와 북한의 평양 인근으로 밝혀져 있다.

▲세계문화유산 강화 고인돌군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는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면서도 지역적으로는 육지와 분리된 채 일정한 범위 내에 독립된 지역으로, 고려산을 중심으로 15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의 고인돌군은 고려산을 중심으로 하점면 부근리, 삼거리, 내가면 고천리, 오상리, 양사면 교산리 등 5개 지역에 무리지어 있고 주로 능선을 따라 축조됐는데, 고려산에서 흘러내리는 소하천과 인접해 위치하고 있다. 특히, 고천리 고인돌은 해발 280m에도 분포하고 있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강화의 고인돌은 70기로 탁자식(북방식)과 개석식이 혼재돼 분포하고 있는데 탁자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사적 제137호인 강화고인돌(강화 부근리 지석묘)이다. 남한지역에서는 최대 규모로 덮개돌의 크기가 6.5m, 너비 5.2m, 두께 1.2m, 무게가 52t이 넘는다. 반경 30m 범위 안에는 소규모 고인돌이 3~4기씩 무리를 이루고 있다. 당시 대규모 고인돌의 축조가 이뤄졌다는 것은 많은 수의 인원을 동원할 정도의 집단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된다.

▲인천지역 선사인의 흔적 학익동 고인돌
그동안 인천의 외형적 팽창과 개발이 진행되면서 부지불식간에 사라진 문화유산이 많은데, 고인돌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화의 고인돌군 외에 비류의 근거지가 됐던 남구지역의 주안동·문학동·학익동 고인돌과 서구지역의 대곡동 고인돌군, 영종도·백아도·덕적도 등 도서지역을 포함한 인천 전역에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음이 파악되고 있다.

주안동 고인돌은 용일사거리 부근 사미부락에 있었던 것인데 1957년에, 문학동 고인돌은 도천현 남쪽 언덕 밭 가운데 있던 것인데 1962년 조사 발굴됐다. 학익지석묘는 1927년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 조사됐고, 학익동 소년교도소 서쪽 언덕위에 있었는데 교도소를 늘리느라 1971년 자유공원 박물관 위로 옮겼다가 현재는 옥련동 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근래에 발굴된 서구 대곡동 고인돌군과 함께 모두 북방식 형태가 특징이다.

▲한민족 공동체의 연결고리, 인천
세계 각국에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만큼이나 많은 고인돌이 밀집해 분포한 나라는 없다고 한다. 현재는 강화·화순·고창의 고인돌 총 820여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고창·화순 고인돌은 보존상태가 좋고 분포 밀집도가 높으며, 강화 고인돌은 형식이나 분포 위치 등에서 연구할 만한 가치가 높아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여기에 2만여기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북한 고인돌의 중요성도 남한의 어느 지역 고인돌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가장 큰 덮개돌을 가진 황해도 은율군 관산리 1호 고인돌은 그 크기가 무려 875㎝인데, 대규모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이 불가사의한 일이다.

강화지역의 고인돌은 동북아시아 무덤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특히, 남한과 북한 고인돌의 맥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주로 서해안 일대에 중점적으로 분포한 고인돌은 그 부장품들과 함께 선사시대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중심에 인천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 근거라 하겠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