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정체성 찾기-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 5 철도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있다. 한복을 단정히 입은 조선정부의 관리들과 300여명의 인부들, 양복 차림의 서양인 몇몇이 인천부 우각리(牛角里ㆍ지금의 도원역 인근)의 한 언덕바지에 모여 역사적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찍은 사진이 대대손손 전해지리라 그들 스스로 믿었을 법한 자부와 긍지에 찬 모습이었다.

때는 1897년 3월22일 오전 9시. 사진 속의 인물은 정부를 대표한 이채연 이하 고관들과 각국의 외교관, 철도 부설권자 미국인 모오스, 공사 감독관 콜브란 등과 인부들이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철로를 놓기 위해 모였으나, 이날 기공식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힘겹게 마련한 것이었다.

그에 앞서 우리나라에 철도를 부설하자고 처음 제안한 이는 재미 대리공사 이하영이었다. 신문물에 쇼크를 받은 그는 1889년 귀국하자마자 화륜거(火輪車ㆍ기차)의 모형을 들고 황제를 알현해 철도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조정은 물론 깨어있는 백성들은 모두가 우리 힘으로 나라를 개화를 하자는 데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자력으로 철도를 건설할 수 있는 자본과 기술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일본, 러시아 등은 호시탐탐 철도 장악을 노렸다. 정부는 그를 견제할 요량으로 부설권을 1896년 3월 미국인 모오스에게 넘겼으나 그는 1898년 토목공사의 반을 끝낸 후 자본난에 봉착해 공사를 중단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후 경인철도합자회사가 1899년 9월18일 인천역에서 개통식을 갖고 경인선을 운영했지만, 식민침탈의 도구로써 역사의 어두운 터널을 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선대들의 눈물 나는 분투가 씨앗이 되어 오늘 경인선에 복복선이 놓이고, 전국에 KTX를 위시한 최신형 철마가 사통오달 달리는 철도 선진국이 됐으니 감회가 깊을밖에 없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