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옛부터 전략적 요충지 … 왕가 고향
[인천일보 연중기획] 옛부터 전략적 요충지 … 왕가 고향
  • 강덕우
  • 승인 201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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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4)역사고도(古都) 인천의 출발지, 문학산
▲ 문학산성 동문.
고구려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선진의 철기문화를 가지고 한반도로 남하했고 이들은 백제건국의 시원이 됐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한반도 서해안지역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던 인천은 신석기·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확장돼 기원전 1세기경에는 비류에 의해 '미추홀(彌鄒忽)'을 건설케 하는 기반을 이뤘다. 백제가 국가를 세운 것은 기원전 18년으로 인천기(仁川紀)로 환산하면 올해 2014년은 2032년이다.

▲서해안 방어기점 '문학산성(文鶴山城)'
문학산은 해발고도 213m, 동서 약 2.5㎞의 작은 산기슭으로 남구의 문학동·관교동·학익동과 연수구의 선학동·연수동·청학동·옥련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인천 사람들은 예로부터 문학산을 배꼽산이라고 불러 왔는데, 산봉우리의 봉화대(烽火臺)가 흡사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형국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문학산은 일찍부터 인천의 진산(鎭山)으로 산성(山城)이 있어 성산(城山)이었고, 고을 관아 남쪽의 안산(案山)으로 여겨져 남산(南山)이라 불렸다.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단지 인천부사로 재임 중 학문과 교화에 힘썼던 이단상(李端相)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서원에 '학산(鶴山)'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숙종 34년·1708) 학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고 있고, 여기에 인천 향교의 문묘(文廟)를 합해 '문학산'이라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는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18세기 중엽(1757~1765)에 펴낸 <여지도서(輿地圖書)> 산천조(山川條)에 처음 등장한 이후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산의 정상에는 테를 두른 듯한 모양의 산성이 축조돼 있다. 처음에는 토성(土城)이었던 것이 삼국 말 또는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석성(石城)으로 개축됐고 이것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류와 미추홀의 옛 성으로 기록된 이 산성은 비류정(沸流井)이라는 우물을 갖추고 있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이 옛 성을 수축해 지키면서 여러 차례 왜적을 무찌른 기록도 있다. 양란(兩亂) 이후에도 문학산성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이의 수축이 논의돼 왔다.

문학산성의 봉수는 갑오개혁을 전후로 봉수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사용됐다. 멀리 전라도 순천에서 출발해 진도, 수원, 그리고 안산의 정왕산 봉수에 잇닿고 있었으며 다시 부평, 김포, 강화, 양천을 거쳐 한성의 남산에 이어지면서 조선시대의 군사적 통신수단의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성내에서 바라보면 북쪽으로는 인천향교를 비롯한 인천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서쪽으로는 서해 바다가, 남쪽으로는 연수구의 신시가지가 바라다 보인다.

신미양요가 발발했던 1871년, 당시 인천부사 구완식의 조카 구연상이 저술한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는 4월6일부터 5월23일까지 총 48일간, 미국 전함의 종적과 문학산 진중에서의 전시체제 상황을 기록한 자료인데 이를 통해 인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문학산성은 인천의 남쪽을 받치고 있으면서 서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시 생활근거지에서 입성해 전술을 수행하는데 용이했고, 방어에도 유리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관계로 개항기까지 서해 연안방비의 주요한 거점이었던 것이다.

▲왕가(王家)의 고향
문학산 일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쟁패 속에 부침을 거듭하다가 고려 왕조에 들어와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호족세력 인주 이씨(仁州 李氏)와 함께 왕가(王家)의 고향으로 태어났다. 문종조에서 인종조에 이르는 7대 80여년 동안 고려 왕실의 왕자·궁주 가운데 인주 이씨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칠대어향'(七代御鄕)으로도 기록된 인주 이씨 시대가 펼쳐졌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인천도호부 관아와 향교가 서고, 학산서원이 자리 잡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 인천은 세종의 왕비였던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외가(外家)였다. 또한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외가였던 관계로 마침내 세조 5년(1459) 11월5일 인천군(郡)을 인천도호부(都護府)로 승격했는데 이후 그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문학산은 퇴락했으나 1958년 허물어진 동문을 복원해 '문학산성동문(東門)'이라 새겨 넣었고, 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십제고도문학산성(十濟古都文鶴山城)'이라는 표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산의 전략적 가치가 높았던 것에 기인했으리라 보이지만, 1962년 미군기지가 들어섰고 1979년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그 자리를 한국군이 이어 받게 됐다. 1986년 문학산성은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지만, 인천 역사와 문화의 상징적 지역인 문학산이 일부나마 인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또 다른 2000년을 희망하며
인천 도심의 한가운데서, 역사와 자연이 푸르게 살아 숨쉬는 문학산으로 되살리는 일에 시민들이 나서고 있다. 지방정부 역시 문학산 성곽을 복원하고 산성과 문학경기장을 연결하는 탐방로를 조성해 등산을 즐기면서 역사의 향기를 느끼도록 하고 있다. 또한 생태적이면서도 역사적인 공간으로 복원해나가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마련하고 있다.

이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자명한 일로 하루라도 빨리 그 시기가 앞 당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은 문학산이 인천의 발상지이고 2000년 백제 건국 설화가 담겨져 있어, 이의 복원이 곧 인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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