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우정총국 인천본국 개국 우표 한 장에 편지전달 신문물 체험
▲ 옛 인천지역 우체부.
1884년 11월17일은 우리나라 우정사(郵政史)에 신기원을 연 날이다. 백성들이 신문물을 실감나게 체험한 날이기도 하다.

이날 아침,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인천감리서 안 우정총국 인천분국에 들어선 월남 이상재 선생은 상기된 모습이었고, 손에 든 동그란 '인(仁)' 자 소인을 감회 깊게 내려다보았으리라고 추측된다.

'인' 자는 말할 것도 없이 개항장 '인천'을 나타낸다. 월남 선생은 첫날, 첫 편지에 붙인 문위우표 위에 역사적인 소인을 찍었는데, 팔도의 역참마다 관용 파발마가 오간 지는 오랬어도 백성이 제 스스로 기별을 전하기는 처음이었다. 10문짜리 우표 한 장만 붙이면 나라에서 편지를 어디든지 전해 준다니 신통한 일이었다.

그 같은 근대적인 제도 도입의 최전선에 서서 인천분국의 개국을 진두지휘해 온 월남 선생 등 우정국 인사들의 노고가 컸으리라는 것은 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해 12월4일 우정총국 개업 축하연에서 벌어진 정변으로 우정국은 닷새 뒤 문을 닫았고, 총판 홍영식은 대역죄로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에 반해 일본은 1882년 12월부터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 내에 소위 '재외 우편국'을 두어 불법적인 우편 업무를 계속하였고, 중국 역시 '인천해관(현 세관)'을 압박해 세칭 '해관 우편'을 강요하며 모든 우편물에 중국의 '용(龍) 우표'를 사용하고 있었다. 두 나라가 뻔뻔스럽게 우리의 우편권을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편제도가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895년이었다. 하루에 두 번 인천ㆍ서울의 우체부들이 오류동에서 만나 우체낭을 교환했고, 백성들은 비로소 본격적인 소통을 시작하게 됐다. 인천은 국민 개개인 간의 소통을 실천한 선구적인 커뮤니케이션 도시였다. 그 후 우편제도는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