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제비꼬리 물줄기 형세라 '연미정' 조운선 행렬 장관 생동감 넘쳐
[인천일보 연중기획] 제비꼬리 물줄기 형세라 '연미정' 조운선 행렬 장관 생동감 넘쳐
  • 이영태
  • 승인 201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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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3) 인천팔경과 팔경시(八景詩) - <강화십경>의 연미조범
▲ 옛 연미정 모습. <속수증보강도지>(1932)

 

▲ 연미정의 모습. <신편 강화사>(2003)

 

응시 대상이 단수이냐 복수이냐에 따라 응시자의 시선은 고정되거나 확장되기 마련이다. 전자는 나무 한 그루를 보는 경우이고, 후자는 나무 몇 그루를 동시에 보는 경우이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장단점이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가 동영상처럼 움직이고 있다면 응시자가 느끼는 감동은 증폭된다.

'연미정의 조운선'이라 하는 연미조범(燕尾漕帆)이 이에 해당한다. '연미정에서 조운선의 행렬을 바라보기'라 풀이할 수 있는데 정자가 위치한 공간의 특성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조운선의 행렬이 <강화십경>의 여섯 번째이다.


이에 대해 고재형(高在亨·1846∼1916)이 시를 지었다.




한강이 남쪽으로 갑곶나루로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승천포로 흘러가는 중심에 연미정(燕尾亭)이 자리 잡고 있다. 물줄기가 나뉘어 흐르는 형세가 제비꼬리를 연상하기에 연미정이라 지칭했다. 서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의 중심에 위치하여 사방이 훤히 트였기에 "빗장처럼 한양을 보호하고 적을 막아내는 형세가 이 연미정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며 강화 유수 김로진이 기문(記文)을 남기기도 했다. <심도지>의 누정편에 따르면 "강화에서 으뜸가는 명승(盖沁中第一名勝云)"으로 기록돼 있다. 이른바 경치 감상과 군사 목적을 동시에 가능하게 했던 장소였다.
세곡(稅穀)을 실은 조운선은 그 앞을 지나 마포로 향해야 했다. 태평한 시절에 세곡선이 줄지어 가는 광경을 연미정에서 감상했다면 절경이 동영상처럼 움직인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재형이 그곳을 답사하던 때는 대한제국기였기에 '그 많던 배 지금은 어디 있나' 하며 순후한 풍속이 지속되던 시기가 아닌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둔암(芚菴) 송연(宋淵·?~?)의 <연미정에 배를 대다>라는 한시이다. 어둠과 비바람이 노정(路程)을 막았지만 작자의 심사가 불편한 것은 아니다. 연미정에서 서쪽으로 7㎞ 떨어진 곳에 석주(石洲) 권필(1569~1612)이 세운 반환정(盤桓亭)이 있는데, 그 곳에는 술과 시를 매개로 자신과 종유했던 권필이 기다리고 있기에 하루쯤 지연되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 '어느 집(誰家)'은 새 술을 빚어놓고 작자를 기다리고 있던 권필의 집이었을 것이다.

연미정은 고려 고종 19년 강화 천도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중종 때의 명장(名將) 황형(黃衡·1459~1520)의 집터로 알려지기도 했다. 여러 차례 중수됐는데,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인으로 최초로 근대정미업소를 세웠고 동산중·고교의 설립 및 확장에 도움을 주었던 유군성(劉君星·1880~1947)이 1931년에 보수했다는 점이다.


"고향을 내가 감히 잊을 수는 없으며, 이루어짐을 기뻐하고 무너짐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이 똑같이 여기는 것이다. 하물며 연미정은 강화도의 눈썹과 눈이고 원호는 명승지이며…, 옛 건물을 보존하는 일은 한 마을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지지만 나에게는 응당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짐짓 이것을 기록하여 고향 어린이들이 힘쓰기를 당부하노라."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인천항의 정미업계에서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던 유군성이 연미정 보수에 선뜻 나섰다. 지금의 행정구역에 기대면, 인천 중구에서 치부하여 그것을 강화 문화재 보수에 사용했던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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