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3.물맛 다른 풀장에서 수영하다
1971년 율목풀장 개장 … 규격없이 시멘트 부어 조성

아동들, 비싼 입장료 탓에 몸 불때까지 온종일 놀아




여름철 대표적인 놀이시설인 옥외풀장이 대부분 이번 주에 폐장한다.

몇 발자국만 떼면 바닷가였던 인천에서 풀장은 그리 흔한 시설이 아니었다.

1971년 6월22일 옛 시립도서관(현 율목도서관) 뒤편에 율목풀장이 개장했다.

사진은 개장 첫날 시범 수영을 하는 모습이다.

규격 없이 그저 넓게 시멘트를 부어 어른용, 어린이용 풀을 각각 한 개씩 만들었지만 이 풀장의 개장은 인천시민에게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주안 염전이나 용현동 낙섬 등에서 짠물로 멱을 감던 아이들은 여름방학 중 율목풀장에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휴가와 레저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풀장에 다녀온 꼬마는 동네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렵사리 풀장에 가면 입장료 생각에 온몸이 퉁퉁 불 정도로 물속에서 놀았다.

이곳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수영을 즐겼는데 당시 만해도 여성들이 도심 한가운데 노천풀장에서 노출이 심한 수영복 입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율목풀장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상당수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뼈가 나뒹굴던 산꼭대기 땅이 '풀장'으로 환골탈태하자마자 금세 인천의 명소가 됐다.

지하수를 퍼 올려 쓰던 이 풀장에 시체 썩은 물이 흘러든다는 괴담이 돌곤 했다. 아마도 풀장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퍼뜨린 소문일 테지만 아무튼 입술이 파래지도록 물이 차가웠던 것은 사실이다.

이 풀장은 1996년 폐쇄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공원으로 조성됐다.

공사를 하던 중 땅 속에서 귀와 목이 잘린 채 거꾸로 매장된 문인석 6점이 발굴됐다.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저지른 행위였던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그중 3개의 문인석이 현재 율목공원 맨 위쪽에 세워져 있다.

율목풀장에 앞서 오림포스호텔(현 파라다이스호텔) 마당에 풀장이 있었다.

1965년 12월 호텔이 개업했고 이듬해부터 풀장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투숙객을 위한 시설이었지만 일반인 출입도 허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존재도 모를 만큼 일부 여유 있는 시민들만 이용했던 풀장이었다.

1968년 8월20일 이 풀장에서 당시에는 굉장히 생소하고 '외설스러운' 행사가 하나 열렸다.

영국에서 온 전위 미술가가 보디페인팅 시범을 보였는데 언론에서는 이것을 '나체에 그림 그리기'라고 소개해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 풀장은 1988년경에 폐쇄되었고 현재는 주차장이 됐다.

문학산 기슭에도 풀장이 있었다.

샘물이 풍성하게 흘러나와 땅 소유주는 1969년 공중목욕탕으로 허가를 받아 '청학풀장'을 만들었다.

주변 자연환경이 좋아 지금도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개장을 하는 이 풀장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풀장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오래됐다.

지금의 학익동 송암미술관 주변에는 새인천풀장이 있었다.

바닷물을 끌어들인 도크식 풀장으로 동양화학 계열사인 동양관광개발에서 1974년 경 부터 80년대 초까지 운영했다.

키 작은 아카시아나무 몇 그루 밖에 없었던 뙤약볕 아래의 풀장이었다.

동양화학은 1976년 1월 이곳에 해양종합관광지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해면 매립지 1만 5천평에 동양 최대 규모의 매머드 수족관과 수중터널, 해수풀장을 비롯해 휴게실, 조탕, 쇼핑센터 등을 갖춘 8층 짜리 관광호텔을 세운다는 계획이었지만 조감도만 남긴 채 첫 삽도 뜨지 못했다.

인천 시내에 있던 풀장들은 개장하자마자 콩나물시루처럼 항상 만원이었다.

문제는 위생이었다.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아 간혹 '구정물 풀장'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당시에는 풀장 관리에 대한 법규가 없어 보건사회부는 공중목욕장업법 규정을 적용했다.

①풀장 내의 풍기문란 금지 ②전염병 환자 입장 금지 ③하루 세 번씩 환수(環水, 물갈이) 조치 ④인체에 해로운 세균을 막기 위한 염수 소독 ⑤변소, 탈의시설 구비 등이 지켜야할 규정이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