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2)해양 교류의 거점, 인천
▲ 갑문, 스웨잉그식, 미국 피츠버그시 마크린틱 마샬사 제작.
▲ 현재의 인천항.
비류 백제가 인천 미추홀을 수도로 선택했을 때부터 인천은 바다로의 진출과 숙명적인 관계를 맺게 됐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미 1600여년전 백제시대에, 해양을 통한 중국과의 최초의 교류가 인천 능허대를 통해 있었고, 그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예나 지금이나 중국과 일본으로 오가는 해양 관문일 수밖에 없었다.

▲제물포의 변화
인천항은 원래 인천군(仁川郡) 다소면(多所面)의 해안지대인 제물량(濟物梁) 일대로 조선 초기 이래 이 곳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영을 두고 서해의 방어를 담당하면서 군항이나 상업항으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강화도가 군사적으로 부각되고 보장지지(保藏之地)가 됨에 따라 제물량이 강화도로 옮겨가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인천의 제물량 지역은 군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그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 놓이면서 항구로서의 개발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제물포 해안은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서해안 최적의 개항장으로 부각됐고, 각국의 조계지가 설정되면서 '국제도시 인천'으로 변모하는 거대한 실험이 이뤄졌다. 인천항 개발의 첫 삽을 든 것은 개항 다음 해 1884년 9월 인천해관의 러시아 토목기사인 사바찐(Sabatin)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제물포항의 개발 조건은 열악했고 또 연간 예산도 부족해 15~16명의 인부를 동원, 다음해 8월 완공했지만 항만으로서는 초보적인 시설에 불과했다. 그리고 10년 후 1893년 두 번째 개발 사업이 진행됐는데, 영국인 기사 챔버스(Chambers)의 설계에 따라 당시 해관 앞의 바다 즉 현재의 파라다이스 호텔 남쪽 도로를 메워 부두를 축조했다. 이를 '챔버스 라인'이라 명명했지만 이 역시 항만개발이라 이름 붙이기조차 열악한 실정이었다.

▲동양 유일의 갑문(閘門)
통감부를 설치해 조선에 대한 독점적 패권을 확보한 일본은 1906년을 시작으로 인천항에 대한 본격적인 항만 수축사업, 근대항으로서의 전면적인 인천항 개발사업에 착수했다. 1단계로 1911년까지 부두확장과 세관시설 정비 그리고 내항 준설공사 등의 사업이 진행됐지만 인천항 발전의 최대 걸림돌인 '조수간만의 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지속적인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인천항 축항계획은 선박의 출입이 자유로운 '2중갑문식 선거(二重閘門式船渠)'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사도(沙島)와 세관 매립지 남쪽에서 오늘날 인천여상이 자리잡고 있는 해면을 매립하고, 4500t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크기의 인공 항만 제1선거 축조를 시작했던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에서 두번째 수감생활 하던 시기, 이 축항 공사장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강제 노역했던 기록속에서도 그 질곡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인천 축항은 최초의 근대적 갑문식 도크 공사로 착공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공사 시작 7년여 만인 1918년 10월27일 선거를 비롯한 제반설비는 대략 준공됐으나 잔여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1924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선거축조공사가 일단락되던 다음 해 1919년부터 이미 계획된 물동량이 초과됐는데, 제1차세계대전이 종식돼 세계무역이 활발해진 데에서도 원인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인천항의 하역 능력이 크게 향상됐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이 중국대륙의 침략을 시작하면서 인천항을 대륙침략의 전초 기지항으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래서 이에 필요한 적절한 공업항을 물색하기 위해 인천항 북부에 대한 수로조사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 월미도 서부에서 율도 북쪽에 이르는 수로가 대형선박의 정박이 항시 가능한 수심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 해안에는 광대한 간석지가 발달돼 있음을 알게 됐다. 따라서 이 간석지를 매립해 광대한 공장지대를 형성하고 이로부터 경인공단지대와 연결하면 자유로운 공업항으로서 천연의 양항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른바 북항공사는 1938년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순시할 정도로 공사가 중시됐지만, 19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전국이 전시통제경제체제로 변화되면서 1943년 중단되고 말았다.

▲해양도시 인천의 정체성 구현
6·25전쟁으로 인천의 항만시설은 거의 파괴됐으나 1954년 90만t으로, 1961년에는 종래의 130만t으로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우리 경제는 고도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물론 경제의 대외의존이 심화되고 빈부격차 등 사회모순이 격화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지만,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서울의 출입구였던 인천항의 확충문제는 시급한 과제로 대두하게 됐다. 제2도크 공사는 경제개발의 성공적인 수행과 국제 선박의 대형화 추세로 인해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가로 질러 바다 전체를 막아 내항화하고, 5만t급 갑문 1기를 설치해 동양 최대의 갑거를 축조하게 됐다. 이제 인천항은 크게 갑문 안 내항과 외항으로 구분하게 됐고 외항은 그 위치에 따라 북항, 남항, 연안부두 등으로 나눠졌다.

2020년을 목표로 인천 신항이 건설되고 있는데 앞으로 전개될 서해안시대의 중추적 항만으로서의 역할과 특히 남북 직교역의 증대에 따른 북방교역의 중심항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1600년전 고대 중국으로 가는 뱃길의 효시였고 19세기 근대 문물의 최초 수용공간이었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인천항 제2도크가 완성된 후 40년이 지난 지금이야말로 해양도시 인천의 정체성을 구현할 또 다른 전환점이라 하겠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