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성냥·라이터 생산기지 근대 생활혁명 주도 따뜻한 도시
▲ 성냥 라벨
인천은 등대의 '빛'으로 쇄국의 바닷길을 처음 밝힌 항구 도시이자, 근대의 '부싯돌'인 '성냥'을 국내 최초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배고픔과 추위로부터 삶을 지키게 했던 따뜻한 공업 도시였다. '부시(쇠조각)'로 '돌(석영)'을 쳐 어렵사리 불을 일으키고, 입김을 불어가며 조심스레 불씨를 살리던 '전근대'를 졸업하게 했던 것이다.

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있는 근대 체험이었을까? 지금도 그 감격을 짐작할 수 있을 듯싶다. 예로부터 불은 임금이 백성에게 나눠주는 귀물이었고, 정월에 '새 불'을 받아 밥을 짓고, 구들을 덥혔던 것이니, 저잣거리의 백성들이 저마다 제 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반 만년 생활사에 금시초문인 혁명이었다.

그 생활 혁명을 주도한 도시가 또한 인천이었다. '러시아 대장성'이 1900년에 작성한 문헌의 하나인 <조선에 관한 기록>(원제 : 오삐싸니에 까레이, 김병린 옮김, 유풍출판사)은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 밑에 성냥 공장이 개설됐다. 이 성냥 공장에서 생산된 것 중에서 약간은 중국에까지 수출돼 판매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1917년에 이르러 지금의 동구 금창동에 있던 '조선인촌주식회사'가 대량 생산을 개시했고, 광복 후 '대한성냥' 등이 국내 최대 생산의 맥을 잇다가 6·25전쟁 후 '지퍼라이터'가 유행하자 이번엔 유사 지퍼라이터 생산에 돌입했다. 바람에 꺼지지 않는 신식 불에 매료된 모방산업이었는데, 현재 세계 수집가들의 목록에도 올라 있다.

세월이 흘러 가볍고, 그름과 냄새가 없는 '가스라이터'가 등장하자, 인천은 다시금 전국 제일의 '가스라이터' 생산기지로 군림했었다. 그렇듯 인천은 '빛'으로 바닷길을 밝혀 우리나라가 세계와 교통할 수 있게 하였고, '불'을 만들어 와 백성들에게 따뜻한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한 선구 도시였다. 그런가 하면 매년 전국체전을 밝히는 하늘의 불 '성화'도 강화 마니산에서 채화하고 있다. 모두 잊지 못할 장면들이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