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 (1)역사 속의 인천, 미래를 향한 제언
▲ 화도진 속의 인천(1879년).
▲ 개항 후 인천 모습(1890년).
인천은 '비류의 미추홀'로부터 2030년, '인천' 지명 탄생으로부터 6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그동안 인천이 어떤 곳인지, 그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논의도 있어 왔고, 지금도 궁금해 하고 있다. 우리의 도시 인천, 역사 속에서 그 정체성의 해답을 찾는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아마도 많은 인천인들에게 인천의 이미지는 항구, 도크, 바다, 짠물, 철도 등이 먼저 생각날 것 같다. 또 오랫동안 익살스럽게 회자되고 있던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곱뿌(컵)없이는 못 마신다"거나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 그리고 인천 개항, 맥아더장군 동상, 인천상륙작전,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2014인천아시안게임 개최 등이 아닐까 싶다. 모두 인천을 나름대로 설명하는 표현들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연상되는 이미지만으로는 인천의 정체성을 다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하나 하나의 용어나 사실들을 총체적 개념으로 연결해 보면 역사의 시기마다 감당했던 그 역할과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특성으로 보는 인천
인천의 역사적 성격을 통해 인천의 정체성을 정의 내리기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인천의 미래를 위한 방향제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5가지 특징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인천은 개국(開國)과 왕도(王都)의 고장이다. 참성단과 삼랑성 등 단군(檀君)의 유향(遺香)이 강화도 곳곳에 전하고 있고, 주몽의 후예인 비류의 출발지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인천이씨 출신의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7대 80년에 걸쳐 왕의 고향이자 왕비의 고향이었던 곳이다. 더구나 강화도가 몽골의 침입을 맞아 제2의 수도로서 39년간 항몽(抗蒙)의 근거지가 됐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둘째, 해상교류의 거점이다. 제물포 개항을 통한 근대문물 교류의 중심지가 되기 이전부터 백제시기 능허대(凌虛臺)를 통해 중국과의 교류를 담당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자연도(지금의 영종도)에 경원정(慶源亭)이라는 객관이 설치돼 중국 사신들의 영빈관 역할을 했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고려 말 교동의 향교에는 가장 먼저 공자와 그 제자의 화상을 원나라로부터 들여와 봉안했으며 그 후에 전국 각지에 이를 설치했으니, 바로 해상교류의 거점이 됐던 흔적이다.

셋째, 정신과 사상의 생성지이다. 인천에는 정수사·보문사·전등사 등 전통사찰이 많아 사상적 연원을 찾아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몽골의 침입 하에 강화도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은 불교문화의 정신적 산물이다. 또 향교(인천, 부평, 강화, 교동 등)와 조선후기 강화도에서 생성된 강화학파는 정제두·이건창·정인보 등으로 연결되는 유교문화의 정신적 유산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개항과 더불어 인천항을 통해 신·구기독교가 수용되고 감리교 내리교회·답동성당·성공회 내리성당 등이 설립돼 최초적 의미와 정신적 근거지 역할을 더하고 있다.

넷째, 호국의 공간, 보장처(保障處)이다. 인천은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너무도 익숙히 알려져 있지만, 이미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해상교류와 군사적 방어시설로서 진보(鎭堡)와 돈대(墩臺)가 강화와 인천해안에 마련돼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물론 19세기 열강의 서세동점에 대응하여 나라를 수호하는 보장처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화도진과 연희진, 논현포대 등도 그 역사적 흔적이다.

다섯째, 근대문화의 선구지이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개항장에는 일본, 청국, 영국 등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거류지가 만들어졌으며, 응봉산을 중심으로 각국공원이 조성되고 주변에 청국조계·일본조계 및 각국공동조계가 생겨났다.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돼 갔다.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이나 탑골공원보다 먼저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대불호텔과 각국공원(1888), 경인철도부설(1899), 하와이 이민(1902), 팔미도 등대(1903), 기상대(1904) 등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에 해당하는 역사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역사의 질곡 넘어 개척·도전정신 계승
그러나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개항장일대는 점차 일본인 위주의 도시로 변화됐다. 행정구역이 개편되고,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병참기지로 바뀌어갔다. 당시 일본인들은 끊임없이 '우리 인천'을 외치며 인천을 조선 내의 일본 도시 'Jinsen'으로 조성했기에, 1945년까지 인천부(仁川府)내의 인천인들은 주체가 아닌 주변인으로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인천은 근대문화의 선구지 역할도 했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기에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의 흔적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근대사의 체험현장으로, 또, 반면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천의 정체성은 5가지 역사적 특징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특징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인천이 '개척지', '선구지'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개척과 도전정신'이 인천 역사 속에 녹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천은 이제 또 한번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송도경제자유구역과 청라국제도시의 성공적 조성, GCF와 세계은행 유치, 그리고 인천AG·APG 개최(2014)라는 과제들을 안고, 국제도시로 도약하고 있다. 이 시대 '새로운 인천, 행복한 시민' 사회가 되기 위한 바탕에는 선조들의 이러한 '개척과 도전정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