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등대'와 더불어 뱃길 활짝 …근대문물 조선 방방곡곡 퍼져나가
▲ 소월미도 등대(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 현재의 팔미도 등대.
인천일보가 '인천 정체성 찾기' 시리즈로 본보 조우성 주필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 기획을 매주 화요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우리나라의 근대를 이끌어 나간 역사적인 장면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연재물입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1. 팔미도 등대
이 땅에 근대의 빛을 비로소 비추기 시작한 곳은 인천이다.

쇄국의 어둑어둑한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던 섬 팔미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것은 지난 1903년 6월1일. 조선 정부가 인천에 '해관 등대국(海關 燈臺局)'을 설치한 지 1년여 만에 이룬 일로 우리 해양사(海洋史)의 쾌거이자 신기원이었다.

1883년 인천 제물포가 개항되기 전까지의 전말이 기구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열망하던 근대화의 의지가 굴절·훼손되는 역사적 아픔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날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서(北長子嶼)에 함께 세운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 등은 오랜 세월 닫혀있던 뱃길을 처음 열게 했던 것이다.

이들 등대와 등표는 그 자체로서도 국제교류의 전초적 상징이기도 했다.

당시 그 같은 기기(機器)를 제작할 만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 축적이 없었던 등대국은 "서울 덕수궁 석조전을 설계한 영국인 하딩(J. R. Harding)에게 부설과 관리를 자문하였고, 등명기(燈明機)는 프랑스 조명 기계를 수입해 설치했다."(정상천 지음, '한ㆍ프랑스 이야기')

그 이전만 해도 인천을 찾아온 외국 배들은 주로 양요(洋擾), 왜요(倭擾)를 일으킨 군함들이었지만, 등대 설치 이후에는 증기기관을 단 이양선(異樣船)들이 갖가지 신식 '박래품(舶來品)'을 싣고 왔다. 더불어 신교육, 종교, 제도, 군사, 경제, 문화 등 온갖 분야의 '근대'가 인천에서부터 조선팔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팔미도 등대의 역사적 소명은 그처럼 컸다. 뿐만 아니다.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막중한 구국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본보는 창간 직후 최초로 '팔미도 등대'의 역사성과 문화재 지정을 보도·제안한 바 있는데, 현재 한국 등대 문화유산 제1호, 인천시 지방문화재 제40호로 보호되고 있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