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인민소비품은 각 공장·기업소, 또는 협동농장이나 그밖의 군소 단체가 조직한 가내작업반에서 부산물이나 폐설물을 이용하여 생산한 식료품·옷감·일용잡화·공예품·가구제품·전기제품 따위를 뭉뚱그려서 부르는 말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되는 8·3인민소비품 창조운동이란 각 공장·기업소, 또는 협동농장이나 그밖의 군소 단체가 가내작업반을 확대하여 8·3인민소비품의 생산량을 늘리려는 생산증대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명 가내작업반 창조운동으로도 불리었다.

 이 운동은 지난 1958년 6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지방공업을 발전시킨 데 대한 대책」이라는 결정을 채택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직장에 다니지 않는 부녀자와 연로보장 노인들이 주로 투입되었다. 인민반장을 앞세워 유휴노동력을 생필품 생산분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러니 성과는 자연 지지부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난 1984년 8월3일, 당중앙(김정일)이 평양에서 열린 전국경공업제품 전시장을 시찰하면서 『공화국 각지의 공장·기업소와 협동농장 안에 가내작업반을 확대 조직하여 부산물이나 폐설물을 이용하여 생활필수품을 생산하고, 이를 각 시·군이나 구역의 각 직매점을 통하여 인민들에게 공급하라』고 지시를 내린 후부터 이 생필품 생산증대운동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품의 이름도 8·3인민소비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공화국은 이 8·3인민소비품 생산증대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지난 시절 내내 공화국 각지의 공장·기업소, 또 협동농장과 그밖의 군소 조직체 안에 생필직장과 생필품작업반을 조직하여 소속 노동자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산활동을 하도록 각 지역여성동맹(여맹) 조직을 앞세워 독려하기도 했다.

 그바람에 성복순은 생각지도 않던 김유동 부비서의 부인을 여러 차례 만났다. 이 지역 리민영 여맹위원장이 김유동 부비서의 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1988년) 10월에는 동림군이 8·3인민소비품 생산 모범군 칭호를 받았던 관계로 성복순은 이 지역 여맹위원장으로부터 격려의 인사까지 받게 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간이 콩알만해지기도 했다. 노동교양소 안에서 기쁨조원으로 생활하다 출소한 그녀의 내력을 훤히 알고 있는 리민영 여맹위원장이 남편의 깔개노릇(정부노릇)을 한 그녀의 머리칼이라도 쥐어뜯으면서 새암이라도 부리면 그녀는 꼼짝 못하고 당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민영 여맹위원장은 한번도 그녀한테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저 만나기만 하면 8·3인민소비품 이야기만 했다.

 성복순은 그때 알았지만 8·3인민소비품은 공화국 국영상업망을 통해 인민들에게 공급되는 생활필수품 총 유통량의 10% 수준에 이를 만큼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산에 참여하는 대상은 세 부류로 구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