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해인 1985년부터 1987년까지는 공화국을 3년 동안 연속적으로 강타한 태풍 때문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공화국 전체 인민들의 식량사정이 긴장되어(급박해져) 입쌀과 잡곡의 배급비율도 3대 7에서 2대 8로 바뀌었고. 한 달에 두 번씩 나오는 배급도 열흘씩 스무날씩 늘어지면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 다음해인 1988년과 1989년은 내리 3년 동안 태풍피해를 입은 협동농장이 복구할 기력도 잃은 채 손놓고 있었던 관계로 인민들의 식량 배급 사정은 날로 악화될 수밖에 없었고, 인민반장은 고개를 떨군 채 마을 사람들을 향해 양해를 구하기에 바빴다.

 그래도 지난 시절에는 배급날짜가 고무줄처럼 제멋대로 늘어지고, 입쌀과 잡곡의 비율이 3대 7에서 2대 8로 바뀌고, 금년 들어와서는 1대 9로 바뀌었지만 그것이라도 제대로 나오기나 한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다고 했다. 앞으로는 그나마도 나올지, 안 나올지 예측도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두들 량정사업소만 바라보지 말고 제마끔(제가끔) 식량사업을 해야만 「하루 두 끼씩만 먹자」고 하는 당의 캄파니아(캠페인)도 성과를 거둘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하루 두 끼 끼니를 이어 나갈 길도 막막합네다』하고 선전하는 양정사업소 일꾼들의 이야기는 더욱 깊은 한숨을 배어 나오게 했다.

 그나마 딸이 66호 노동교양소 가내작업반 식료품소조에서 일하면서 식량사업을 잘해 와서 배급날짜가 고무줄처럼 열흘씩, 스무날씩 늘어져도 엄씨는 끼니를 못 끓이는 날은 없었지만, 만약 황해도 새금천 땅에 살던 딸이 이곳으로 옮겨와 노동교양소 김유동 부비서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자신도 이 엄동설한에 강냉이지게미죽으로 연명하며 추위와 싸워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몰아치는 바람소리가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딸은 이 무서운 칼바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아이까지 업고 나서려고 했다. 엄씨는 그런 딸을 지켜보고 있으니까 건강한 육신과 젊음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건강하고 젊은 것이…엄씨는 젊은 딸이 죽은 사위의 사진만 바라보며 어린 영인이와 함께 청상과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만 콧잔등이 짠해지는 것 같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얘야, 네 오라비 친구, 유동이 그 사람하고는 앞으로 어카기로 했네?』

 엄씨는 딸이 기저귀를 채워주는 영인이를 받아 안으며 물었다. 성복순은 사위 파젯날 노친네가 별걸 다 묻는다며 눈을 흘겼다.

 『영인이 배어 노동교양소에 들어갔을 때 오빠가 살갑게 도와주었기 때문에 기러지, 내가 지금 오빠한테 어카갔시요?』

 『기래. 옛날부터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을 잊으면 배은망덕자가 된다고 했다. 네 오라비 친구, 유동이 말이다, 그 사람이 집에 한번씩 찾아오면 잘해 주어라. 이 어린 영인이와 함께 배 굶지 않고 살기 위해서라도 기런 사람한테는 잘해 주어야 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