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23 우현학의 정립을 기다리다 - 연재를 마치며
   
▲ 국보 제180호 김정희필 세한도 (金正喜筆 歲寒圖).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했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세한(歲寒)이란 『논어』에 나오는"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는 글에서 유래한다. 세한도는 김정희(왼쪽 초상)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뒤늦게


소나무가 시듦을 알 수 있다"

우현, 혼탁한 시대 온몸 바쳐

한국미술사연구 주춧돌 놓아



삶·학문적 성과 재조명 노력

선구적 의미 강조 못 넘어서

인천, 우현학 정립 힘 쏟아야


 

   
▲ 김정희 초상.



▲ 문사철 전유, 선비의 풍모
겨울이다. 추위가 맵다. 가로수는 지난 여름의 푸름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난 채 추위에 맞서고 있다. 나무의 발가벗은 모습, 즉 나목(裸木)을 보면서 <세한도(歲寒圖)>를 문득 떠올린다.

잘 알다시피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동주의 표현에 따른다면 이 그림은 '일견 퍽 싱거운 그림'이다. 소나무가 있고 엉성하게 보이는 집이 한 채가 있고, 나무가 두 그루 있는 그림이다. 이는 자연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의(寫意)의 뜻을 그린 그림이다. 더욱이 이 그림은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글씨가 곁들여지고 또 그림을 그리게 된 내력을 적은 글, 이렇게 셋이 어우러져 삼위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더더욱 좋은 것이다.

제주도로 귀양 와서 처량한 중에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가 얻고자 했던 책을 몇 천리 밖 타국에서 구해 보내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을 짓고 글씨로 써 세 가지가 하나로 어울려 명품이 된 것이다.

'세한(歲寒)'이란 『논어』에 나오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는 글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세상이 모두 혼란 오탁할 때라야 청렴한 선비가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이란 이름은 장엄 그대로다. 문학을 꿈꾸던 어린 시절을 끝내 잊지 못하여 평생 산문과 운문의 끈을 놓지 않았거니와 대학시절 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여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문장 사이에 혼효(混淆)시키는 가운데 소년시절부터 바라마지 않던 조선미술사 저술에 생애 모두를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 이래 사학의 가시밭길로 온 몸을 던져 넣은 채 한순간도 옮기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그는 문사철(文史哲)을 전유한 절정의 선비였다. <최열, 「해제(解題) : 개방과 자득의 장엄한 미술사학」 『우현 고유섭 전집』1, '조선미술사 상', 열화당, 2007, p.10>



▲ '참된 인간되기'로서의 학문
다시 『논어』의 글을 인용한다. 널리 알려진 글귀를 다시 읽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닌가."

눈 밝은 이는 이 구절을 세 조목으로 나누어 읽는 것은 잘못이라 일깨워 준다. 첫 번째 구절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란 말은 배움의 즐거움을 말하고 있으니, 학문은 독서나 글쓰기가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가 훌륭하고 행위가 바른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학문은 올바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곧 진정한 사람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남의 잘못을 보고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스스로 반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학문이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언제 어디서나 배우고 익혀야 하고 그러한 배움을 통해 나날이 변화하는 자신의 삶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어지는 둘째 구절은 학문하는 사람은 어쩌면 평생토록 곤궁하고 외롭게 지낼 각오를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학문하는 이는 배움이라는 한 가지 일에 매진하다보면 그리고 한 사람이 천하를 위하고 천추만대를 위한 사상을 품고 있을 때가 바로 적막하고 처량할 때인데 바로 그러한 때에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있어 찾아온다면 모든 시름을 씻을 만큼 그것은 정말 즐거운 일일 것이다. 해서 "도를 같이하는 벗〔朋〕이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공자는 말씀한 것이다. 이 경우 '멀다'라는 표현은 단지 공간적인 거리를 이르는 말은 아닐 것이며아마도 지기를 얻기 어려움을 나타낸다고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지기(知己) 즉 자신을 참으로 알아주는 이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부부 인연을 맺은 아내나 남편도 그리고 자신이 낳은 아들딸도 아니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 그리하여 스승과 제자와의 만남은 때로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셋째 구절인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닌가"라는 말은 학문을 하는 사람은 일생 동안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스로 배움을 즐기며 자신의 삶을 가꾸는 사람 즉 군자로서 설령 한 사람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해서 어찌 남을 탓하고 나아가 하늘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허물이 없는 지를 반성하는 마음가짐 또는 자세야 말로 참다운 학인의 태도요 군자이다.

앞서의 세 구절이 지닌 뜻을 아울러서 살피면 삶 속에서 학문을 닦아 인격을 완성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먼저 스스로 배움의 즐거움을 얻도록 해야 하면, 학문의 기쁨을 얻을 때 비로소 천하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마음을 쓰고 봉사할 수 있다고 간추릴 수 있겠다.



▲ 기억은 역사의 어머니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

이는 '인생의 목적은 좋은 일을 하여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데 있다'거나 또는 '호랑이가 죽은 다음 귀한 가죽을 남기듯이 사람은 죽은 다음에 그가 생전에 쌓은 공적과 인품을 따르는 사회적 평가가 남게 된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의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면 사전식 풀이만 가지고는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살아서도 세상에 이름을 떨친 경우도 적지 않은데 왜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했을까. 인생이란 삶만이 아니고 죽음까지도 아우른다는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천도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성인이며 선인이며 순수한 정의파인 백이·숙제가 어째서 산중에서 굶어죽어야만 한단 말인가. 70인의 제자 가운데서 공자가 가장 학문하기를 좋아했다고 믿었던 안연(安淵)은 가난해서 지게미나 쌀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영양실조로 요절해버렸으니 이래도 천도는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 반대로 도척이라는 도둑의 우두머리는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쳐서 먹고 살인방화를 일삼았으나 제명껏 살다 죽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 할 것이냐고 사마천(司馬遷)은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정의의 인사가 번영하고 불의의 인간이 멸망하는 것도 아니며,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도리라는 것과 역사현상은 모순된다.

백이·숙제가 현인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송을 얻음으로써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났고, 안연은 독실한 선비이지만 공자의 덕으로 그 덕행이 더욱더 드러났다.

이와 같이 암굴(暗窟)에 숨어 사는 덕이 높은 선비가 그 진퇴에 시운이 맞았다 하더라도, 그 이름이 묻혀 칭송되지 못하는 수가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촌리(村里)에 살면서 행실을 닦고 이름을 떨치고자 하더라도 공자와 같은 성현의 덕으로 칭송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에르 노리(Pierre Nora)의 용어로 '터(lieux)'는 구체적인 공간을 지칭하기보다는 공간의 메타포로서 기능한다.

즉 그것은 단순한 기념장소들이 아니라 진실한 기억의 부재를 나타내는 상징화된 이미지이다. 여기에는 기억의 '사물적' 차원, '상징적' 차원, '기능적' 차원이 두루 포함된다. 고대 희랍의 신화는 기억이 역사의 원천임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는 역사의 여신 클리오(Clio)의 어머니이다.



▲ 우현학 정립해 나가야
항구는 열린 공간이다. 뭍에서 보면 땅이 끝나는 곳이자 바다로 나가는 출발지이다.

바다에서 보면 바다가 끝나고 뭍으로 올라 첫 걸음을 밟는 곳이다. 그래서 만남의 장소이자 이별의 장소이다. 시간과 공간을 떠나 항구는 뱃고동 소리로 상징되는 우수가 서리기 마련이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 때로는 역사적인 애환이 깃들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밀려드는 파도처럼 거센 외세가 '개항'이란 미명 아래 몰려왔고 그에 따르는 역사의 비애는 소금물보다도 더 짰고 썼다.

개항이 이루어진 항구는 거센 역사의 물결 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외세의 압력에 굴복한 개항은 불평등조약으로 시작되어 그 조약이 철폐되기까지 1세기에 걸친 수모를 견디면서 이겨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해인 1905년에 태어나 식민지 학정이란 어두운 시절을 살다 1944년 6월26일 안타깝게도 40세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인천에 태어나 자란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미술평론가 최열은 「20세기 조선미술사학의 빛나는 성취」란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다하지 못한 채 돌아서야 하는 아쉬움을 견딜 수 있다 하더라도 다시 볼 수 없을 길 떠나는 아픔이야 어찌 견딜 수 있을까.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이란 그 이름이 사라지던 1944년 6월26일은 마흔 살의 한 천재가 숨을 거둔 날이 아니었다. 드리운 장막 거둬 밝은 햇살 흩뿌림을 소망하던 조선미술사학 동네가 숨을 멈춘 날이었다. 십대의 어린 시절부터 소망했고 스무 살 때엔 아예 스스로 저술하겠다는 조선미술사 구상이 끝내 힘없이 스러져 버린 날이었으니, 청천 하늘 그 많던 별들조차 자취를 감춘 날이었다." <『우현 고유섭 전집』1, 조선미술사(상), 열화당, 2007, p.10>

'전통'이란 결코 이러한 '손에서' '손으로의' 손쉽게 넘어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로써'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치러 '피로써'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얻으려는 사람이 고심참담(苦心慘憺)·쇄신분골(碎身粉骨)하여 죽음으로써, 피로써 생명으로써 얻으려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주고 싶다고 하여 간단히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미술문화의 몇낱 성격」 『우현 고유섭 전집』2, '조선미술사 하', 열화당, 2007. p.107>

우현을 기억하고 또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선구적 의미를 강조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인연과 공덕으로 마침내 열화당이 '우현 고유섭 전집' 열 권을 완간하여 '우현학을 위한 주춧돌'을 놓았고, 앞으로 이를 보완하는 작업은 물론 '우현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우현 아카이브 작업도 벌여 나갈 것이라 한다.

이와 더불어 인천 지역신문인 『인천일보』도 이 같은 일에 동참하고 선양하기 위한 사업을 기획하여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서해안시대를 맞아 인천과 우리 대한민국은 새로이 비약을 꿈꾼다. 이제는 바닷길만이 아니라 하늘길도 활짝 열렸다.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도 지속해야 하겠지만 진정한 목표는 지구촌 모두가 평화공존하면서 사람다운 삶을 가꾸는 일이다. 그 일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면 외로운 길이지만 홀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간 사람들의 공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현 고유섭 선생이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끝>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