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꾼 서신 교류 … 인천박물관 건립 영감 얻어
인생을 바꾼 서신 교류 … 인천박물관 건립 영감 얻어
  • 장주석
  • 승인 2013.12.10 00:00
  • 수정 1970.01.0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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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22 「편지를 통해 우현을 만나다」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

   
▲ 구제물포구락부 건물 전경. 인천시 중구 송학동 1가 1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901년 외국인 사교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7호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은 1946년 4월1일 중구 송학동 1가 1번지에서 개관했다. 이후 1953년 4월1일 구제물포구락부로 옮겨 운영 돼다 1990년 5월4일 지금의 옥련동 건물로 이전했다. 구제물포구락부는 현재 인천광역시문화원연합회가 사용중이다. /인천일보 자료사진

일본유학중 알게 돼 미술의 길로

편지 왕래하며 학문 가르침 전수

끝내 우현과 직접 만나지는 못해



"인천에 박물관 건립 선생님 권고"

해방 후 초대 시립박물관장 역임

한국 미술비평 개척자 평가 받아




▲ 운명이 이끈 만남
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 1919~2009)은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낸 한국미술비평의 개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을 지냈다. 50년대부터 수많은 미술평론서, 작가론, 이론서를 써온 한국 근·현대 미술의 산 증인이다.

석남이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고 한다. 그는 본래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려 하였다. 그가 첫 번째 일본에 건너갈 때 인천 출신의 법률학도로 동경에 있던 장분석이라는 이에게 전보를 쳐서 마중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방으로 출타 중이어서 우연히 전보를 보고 대신 마중을 나온 사람이 역시 인천 출신의 미술학도인 이남수였다. 이런 인연으로 석남은 이남수의 하숙방에서 같이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같은 방을 쓰게 되고 그의 인도로 미술관에 다니게 되고 긴자(銀座)의 화랑(花郞)을 돌아보게 되면서,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에 이끌려' 석남은점차 미술에로 기울게 된다.

우연한 만남은 이어지고 그 우연은 마침내 석남의 인생을 바꿔놓기에 이른다. 동경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던 배인철이라는 친구의 하숙집을 찾아갔다가 거기서 이상래를 만났는데 그는 우현 고유섭의 처남이었다.
이상래의 말이 자형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한국서 구할 수 없는 책을 구해서 보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고서(古書)가 많은 간다(神田)거리를 돌아다니며 책을 골라 심부름을 한 것이 인연이 돼 마침내 석남은 우현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

"아, 존경한다는 것을 갖다 얘기하고 실례가 될까요? 뭐, 그런 걸 문장으로 썼어. 일본말로 '尊敬するのは失禮でしょうか(손케이 스루노와 시츠레이데쇼까)'란 식으로 편지를 딱 썼어. 그 양반도 깜작 놀랐을거야. 그리고 내가 상래군도 나도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인데 도와드리겠다고 썼지." <『아무도 가지 않는 길-한국 미학의 선구자 又玄 高裕燮』, 인천문화재단, 2006. p.145~6>

이렇게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석남과 우현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석남과 우현의 관계는 매우 이채롭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두 사람 모두 인천으로 같다. 우현선생은 인천 중구 용동(龍洞)이고, 석남은 경동(京洞)이어서 지리적으로는 매우 가깝다. 게다가 인천 창영보통학교의 선후배라는 인연도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고향땅에서 함께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선 우현 선생이 1905년생이고 석남은 1918년생이니 14살의 연령차이가 있어 같은 인천에 있었더라도 교제가 있기에는 어렵다. 그리고 우현 선생은 경성으로 이사하였다가 개성박물관장으로 부임하면서 별세하기까지 개성에서 11년이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남의 회고에 의하면 "한번 틈을 내서 개성에 오라고 하시기에 개성을 방문하고자 계획했으나 전쟁 말기의 부산한 분위기와 지장관계 때문에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44년에 마침내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말았다"고 한다.

이처럼 석남이 직접 우현 선생을 만난 일은 없지만 편지를 통해 가르침을 받고 감화를 받았다. 미술사를 공부하게된 것도, 나중에 고향 인천에 박물관을 건립하게 된 일도 모두 우현 선생의 '권고'였다고 석남은 말한다.

"그 양반은 내동[이 부분은 용동을 잘못 기억한 이경성 관장의 착각인지, 아니면 실제로 우현선생이 처가가 있는 내동에 거주했었는지 불명하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두 사람 거주지의 상거(相距)는 아주 근거리이다]이고 나는 경동이고, 이웃동네예요. 그래서 나, 나는 어…마난,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 편지로 와, 왕복해서 만났지. 내, 내가 박물관장이 된 것도 그 양반 뭐랄까. 그 권고…." <같은 책, p.142>

"선생님이 인제, 미학이나 미술사를 공부하시게 된 것도 고유섭 선생님의 어떤…?"
"그럼, 그럼. 더군다나 이례적으로 인천에다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그 아이디어가 고유섭 선생님의 권고랄까?" <같은 책, p.143>

   
▲ 제물포구락부의 옛 모습

▲ 인천시립박물관의 아버지
석남은 1919년 2월17일 인천시 화평동 37번지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교 생활은 1926년 창영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됐으며 1943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러나 입학 후 두 달 남짓 지날 무렵 도쿄 공습이 심해지자 1943년 가을 다시 인천으로 귀국해 만석동에 있던 조선기계제작소에 취직, 서무과에 근무하며 광복을 맞았다.

이 후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에 오른다.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崔淳雨)는 이경성 관장의 회갑기념집 '서(序)'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로부터 30여년 전 세상은 8·15 해방을 맞아서 젊은 지식인들이 모두 제 갈 길을 서둘러 찾을 때 이교수는 서둘러 고향인 인천에 독일 사람들이 지은 빨간 벽돌집을 잡아 아담한 시립박물관을 꾸미고 스스로 그 관장이 되어 있었다. 이교수와 나의 교분(交分)은 바로 그러한 무렵에 시작되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지만 이 홍안(紅顔)의 미청년(美靑年)은 첫 대면부터 벌싸 십년지기처럼 익숙해지는 사람이었다. 이교수는 그때 벌써 서양미술과 현대미술에 밝아서 화단사람들과 미술에 대해 논하고 평단(評壇)의 건설을 뜻하는 다감한 청년이었으므로, 나는 불모지에 가까운 우리 미술비평이나 근대미술사의 정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6·25동란이 일어나서 뿔뿔이 헤어졌다가 모두 피난지 부산으로 모여들 무렵 군복을 입은 이교수도 불쑥 부산 광복동(光復洞)에 나타나서 서로의 건재를 반겼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미술사연표나 한국도자용어집자료니 하는 일에 손대고 있었지만, 국립박물관이 피난지에서 부산시민에게 손쉽게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김인승(金仁承)ㆍ김환기(金煥基)ㆍ배렴(裵濂) 등 화가들과 이교수의 협력을 얻어 국립박물관 주최 「한국현대작가초대전」이라는 것을 준비하게 되었다.

1953년 봄 우리는 국립박물관 부산본부라는 간판을 달고 있던 광복동 뒷골목 4층 건물의 2층을 서둘러 화랑으로 꾸민 후 유화와 동양화를 나누어서 두 번의 중진작가 초대전을 가졌고, 동란중에 작고한 이용우(李用雨) 화백의 유작전도 여는 등 국립박물관으로서는 처음있는 현대미술 행사를 가졌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돌아온 국립박물관은 남산에 있던 구국립민족박물관(舊國立民族博物館) 자리(원래 伊藤博文의 統監府 건물)에 임시로 자리를 잡고 서울 개관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또 「한국근대미술50년사」를 회고 정리하는 한국현대작가들의 구작전(舊作展)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전람회는 1954년 1월부터 3월에 걸쳐 열렸었는데, 이러한 기획전은 아마 우리 화단사(畵壇史)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행사 또한 이교수ㆍ김환기(金煥基)ㆍ정규(鄭圭) 등 여러 친구가 힘을 합해서 도와주었었다. 매우 보수적이던 국립박물관이 부산 피난처와 서울의 임시청사에서 당시로는 대담한 현대미술행사를 갖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교수의 지혜에 힘입은 바가 많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서울 전람회에 모였던 작가들과 작품들은 지금 되돌아보아도 한국근대미술사의 정리와 그 구축작업에 분명한 뼈대 구실을 할 수 있는 주요한 내용들이었다. 이 국립박물관 전람회를 계기로해서 이교수의 한국근대미술사 정리의 의욕이 한층 더 구체와 되었을 것이고, 나도 적지 않은 공부가 되었던 것은 이제 즐거운 추억의 하나가 되었다. 그 때 나는 이교수에게, 당신은 이제부터 한국근대미술사를 맡고 나는 나의 본업인 개화기(開化期)까지의 한국미술사 공부만 하자고 약속을 했었다." <『韓國現代美術의 形成과 批評』 李慶成敎授 回甲紀念한국미술평론가협회 앤솔로지, 열화당, 1980.>


   
▲ 석남 이경성
▲ "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2009년 11월26일 석남은 이 세상을 떠났다. 석남이 타계한 뒤 추모행사가 이어졌다. 2010년 2월에 국립현대미술관 주관으로 이경성 추모세미나가 있었다. 김달진자료박물관에서는 '해방전후 비평과 책'기획전에서 석남의 저서, 50년대 비평문, 생애 사진 등을 집중적으로 전시하였다. 11월 미국 뉴저지에서 1주기 추모 전시회도 열렸다. 또한 석남 이경성 관장 1주기 추모식과 학술세미나가 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모란미술관에서 있었다. 미술관 전시장에 마련된 자리에서 이관장의 약력 소개 후 인천가톨릭대 조광호 신부 집도로 추모미사가 진행되었다. 조 신부는 "늘 만나면 기분이 좋고 소탈하고 따뜻한분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고해성사를 보내왔었다. 떠나실 때 아무런 재산도 없었지만 우리 미술문화에 향기로운 자양분을 남겨 놓으셨다."고 회고했다.

이인범(상명대 교수)는 「석남 이경성 선생의 뮤지엄 인식과 실천」에서 미술관 설립의 당위성을 일찍부터 설파해 국립현대미술관 설립을 일궈내는가 하면, 설립 이후에도 여러 전시, 한국현대미술사 총서 발간 등 미술관 운영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과천미술관 신축 이전이 나라 안에서 이슈로 떠올랐을 때는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두 번에 걸쳐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며 오늘날의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과 그 정초 작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 초에는 향후 뮤지엄 설립에 기약했던 설원식 컬렉션에 적극 가담했는가 하면 워커힐미술관과 일본의 소게츠미술관, 이영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에 자문하여 사실상 한국의 뮤지엄 역사에서 선생의 발길이 스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최태만(국민대 교수)는 「1950-60년대 이경성의 미술비평관」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1950년대 이경성은 위기의식 아래 리얼리티와 현대성이란 기준을 가지고 그 시대를 헤쳐 나가는 글을 썼다. 비록 계몽적 주장이 논리를 앞지른다고 할지라도 그는 시대의 풍토와 타협하지도 그렇다고 불화하지도 않고 자신의 비판적 논지를 펼쳤다. 이러한 비평 활동은 궁극적으로 한국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한 고뇌에 찬 발언이자 제안이었음을 그가 발표한 글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경성에게 붙여진 한국 현대미술비평의 선구자이거나 개척자라는 평가를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비평문화를 정립하기 위해 어떻게 힘든 싸움을 전개하였으며 그것을 통해 현재 우리가 그 시대미술의 흐름을 보다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참고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음을 밝히고자 했다.

목수현(서울대 연구교수)는 「전통과 근대의 다리를 놓다- 석남 이경성의 미술사 인식」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석남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62년 『한국미술사』라는 책을 펴내며 근대미술을 다루었다. 그리고 한국근대미술에 첫 발을 들여놓는 연구자로서, 석남 선생님의 『한국근대미술연구』로부터 그 독서의 첫 장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 미술사'라는 것을 연구 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범주와 개념의 인식에서부터, 근대 미술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어떤 역사의 흐름을 갖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미술관장으로서 생애를 일관하시고 한국미술을 세계미술 속에 위치짓고자 노력했던 평론가로서의 면모에 견주어 미술사가로서의 면모는 잘 부각되지 않은 편이다. 미술사 서술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자세는 오늘의 사건은 내일의 역사가 된다는 석남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석남은 당대의 활동이 곧바로 역사로 이어진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미술사가로서 그것을 정리해 나가야 함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석남은 "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해왔으며, 그의 인간적인 풍모, 온화한 성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한 해 한 사람에 대해 두 번의 학술세미나가 열린 것은 처음 있었던 사례이다. 앞으로는 총론보다 심층적인 각론이 필요하다. 또한 이경성전집 발간 등을 기대하며, 인천에서는 흉상 건립이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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