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19 『수상·기행·일기·시』 가슴에 묻어둔 문학에 대한 열정
   
▲ 우현의 젊은날 감성을 엿볼수 있는 소묘와 단상1.


한학스승 취헌 詩書畵 능통

우현 자연스레 문사철 겸비

경성제대 시절 문우회 활동

근현대문학 빛낸 이들 교류



미학연구 문학적 깊이 배가

세류 휩쓸리지 않는 의지로

필생의 역작 '공민왕' 구상

끝내 집필착수 못하고 요절



 

   
▲ 우현의 젊은날 감성을 엿볼수 있는 소묘와 단상2.


▲빼어난 감수성
우현은 1936년 그의 나이 32살 때에 「애상(哀想)의 청춘일기」란 글에서 8년 전 일기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이런 글을 적고 있다.

"그때만 해도 문학청년으로서의 시적(詩的) 정서가 다소 남아 있었던 듯하여 이러한 구절이 남아 있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정서는 그만두고 일기까지도 적지 않는 속한(俗漢)이 되어 버렸다. 일기라 하여도 그때는 문예적인 일기였다. 그러므로 날마다 한 것이 아니요, 흥이 나면 멋대로 적는 일기였다" <「애상(哀想)의 청춘일기」『조광(朝光)』제2권 제9호, 조선일보사, 1936.9.>

24살 때이면 경성제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던 시절이다. 우현은 그보다 앞서 경성제대 예과 시절에는 '조선문예의 연구와 장려'를 목적으로 조직된 경성제국대학 학생서클 「문우회(文友會)」에서 활동하였다.

그 회원은 유진오(兪鎭午)·최재서(崔載瑞)·이강국(李康國)·이효석(李孝石)·조용만(趙容萬)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문우』에는 시와 수필 창작을 위주로 하고 그밖에 소설, 희곡 등의 습작을 모아 동인지 『문우』를 100부 한정판 발행으로 발행하였다. 이 잡지는 1927년 5호로 중단되기까지 고유섭은 「고난(苦難)」 「심후(心候)」「석조(夕照)」 「해변(海邊)에 살기」 「성당(聖堂)」 「무제(無題)」 「남창일속(南窓一束)」 「폐회(廢墟)」(詩劇) 「춘수(春愁)」 「화강소요부(花江逍遙賦)」 등을 발표했다. 또한 『동아일보』에 연시조 「경인팔경(京仁八景)」을 발표했다. 문우회의 회원의면모를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우리나라 근·현대문학에서 주옥같은 작품으로 문학사를 빛낸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문학활동은 1926년에 '낙산문학회(駱山文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모임에 참가한 동인은 예과 제1회 입학생인 유진오(兪鎭午, 법학), 신석호(申奭鎬, 사학), 강신철(姜信哲, 문학), 염정권(廉廷權, 문학), 배상하(裵相河, 철학)), 함원영(咸元英, 의학), 박천규(朴天圭, 의학)과 제2회로서는 박문규(朴文圭, 법학), 고유섭(高裕燮, 철학), 주평로(朱坪魯,법학)등 열 명이었다. 경성제대 예과의 학내 문학동호인이 조직한 이 '낙산문학회'는 아베 요시게(安倍能成), 사토 이요시(佐藤淸) 등 경성제대의 유명한 교수를 연사로 초빙하여 내청각(來靑閣, 당시 경성일보사 삼층 홀)에서 문학 강연회를 여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동인지 하나 없이 이해 겨울에 해산되었다.

그러나 우현이 글쓰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미 18살 때 「동구릉원족기(東九陵遠足記)」(『學生』, 한성도서주식회사, 1922.)을 발표하고 있다.

이는 우현이 뛰어난 감수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보통학교 입학 전에 취헌(醉軒) 김병훈(金炳勳)이 운영하던 의성사숙(意誠私塾)에서 한학의 기초를 닦았던 것도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취헌은 박학다재하고 강직청렴한 성품에 한문경전은 물론 시(詩)·서(書)·화(畵)·아악(雅樂) 등에 두루 능통한 스승으로, 고유섭의 박식한 한문 교양, 단아한 문체와 서체, 전공 선택 등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현을 두고 '문사철(文史哲)을 전유한 절정의 선비였다'는 지적은 그래서 타당하다.

우현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열정은 그 평생의 염원인 '조선미술사'를 쓰기 위해 가슴 속에 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겉으로는 휴화산처럼 잠시 쉬고 일을 뿐이지 언제 계기를 만나면 다시 불을 뿜을 것이었다. '일기'의 한 대목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가 쉰 살부터 시작된 소설이요, 로맹롤랑의 「장 크리스토프」가 마흔 살부터 쉰 살까지의 작품이고, 괴테의 「파우스트」가 일평생의 작이고 등등, 문예의 전설이 멀고 오랜 환경에서, 또 평생의 그 방면에 대한 근로(勤勞) 나보다 절대(絶大)하고 재질(才質)이 특수(特秀)했던 그들로서 일작(一作)을 세상에 내놓음이 이러한데, 일본 문단의 편편(片片)한 것이야말로 우습지 아니한가. 게다가 그만치도 적공(積功)을 하지 못하는 조선의 작품들이야 다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후세에 남을 것은 가장 예술적인 작품뿐이다. 음악은 당대뿐이요, 미술은 일작일전(一作一傳)에 그친다. 가장 널리 남을 수 있는 것은 문학이다. 연래(年來) 듯 두고 있는 공민왕(恭愍王)의 취재, 차차 마흔이 되어가니 오십일 기(期)로 그 구상은 그려 보기 시작할까. 이것은 어제 황수영 군과 이야기 하다가 한 말이다. <1941년 9월22일 월요일 일기 중에서>


 

   
▲ 우현의 젊은날 감성을 엿볼수 있는 소묘와 단상3.


▲주옥같은 名文들
우현 고유섭의 산문(散文)과 운문(韻文) 등을 묶은 책은 유저(遺著)이긴 하나 일찌기 1958년에 『전별(餞別)의 병(甁)』(通文館)이란 이름으로 간행된 바 있었다. 열화당에서 우현 탄신 100주년으로 기념하여 기획하여 간행한 '우현 고유섭 전집(전10권)에서는 이 『전별의 병』을 바탕으로 아홉 번째 권인 『수상·기행·일기·시』라는 이름으로 다시 묶어 내었다.

이 책에서는 1925년부터 1941년 사이 집필 또는 발표한 산문들을 묶은 것으로, 성찰적 수필과 우리 미술·문화에 관한 산문 스물여덟 편을 제1부「수상(隨想)」으로, 국내외 역사 유적 기행문 여덟 편을 제2부 '기행(紀行)'으로, 1929년부터 1941년까지의 일기와 초기 시(詩) 다서 편을 제3부 '일기·시'로 하여 각각 집필연대순으로 구성했으며, 끝으로 개성부립박물관장 시절인 1937년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던 인터뷰 기사와 1936년부터 1941년꺼지 『조광(朝光)』에 실렸던 설문 여덟 편을 이 책의 '부(附)'로 수록했다. 이 중 「수구고주 와「전별(餞別)의 병(甁)」은 원래 일문(日文)으로 씌어진 것을 미술사학자 황수영(黃壽永) 선생이 번역한 것이고, '우현의 일기'는 저자의 일기 중 일부로, 부인 이점옥(李点玉) 여사가 발췌해 옮겨서 적어놓은 것이다.

우현의 수상(隨想) 중에는 미발표 것을 이번에 새로 소개한 것이 몇 편 있다.

그 가운데 「무종장(無終章)」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도대체 나의 존재는 무엇인고. 서책(書冊) 착심(着心)해 정독치도 못하거니와, 그렇다고 속무(俗務)의 하나일지라도 뚜렷이 묶어 놓지를 못하고 욕심에만 설레어 양자 사이에 헤매고 있으니, 어허 참 괴이한 일이요 한심한 노릇이다"고 스스로를 성찰하면서도 "나는 항상 초장·중장뿐이요 종장을 마치지 못한다. 이것이 나의 글의, 마음의, 일의 진상이니, 종장이 없다고 구태여 말하지 말라. 무리하게 찾으면 거짓〔僞〕이 나오리라"고 말한다. 결과을 두고 꿰맞춘 격이 될지 모르나 우현의 삶이 남들이 누리는 천수(天壽)도 다하니 못하고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종장을 마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거짓'이 아닌 '참'을 찾아 나선 그 구도의 열정으로 남긴 자취는 너무나도 뚜렷하다.

그런가 하면 우현은 "영원한 죄인 됨으로써 영원한 작품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니, 사실로 작가는 불행하다"며 "죄는 행동에만 있지 않다. 마음이 범하는 죄가 오히려 무한이 많다"면서 자유인으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동경하기도 하였다. 「학난(學難)」에서는 "내가 조선미술사의 출현을 용망하기는 소학시대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 스스로의 원성(願成)으로 전화(轉化)되기는 대학의 재학부터이다. 이래 '창조(創造)의 고(苦)' 날로 깊어간다"며 당시의 여건에서 조선미술사란 학문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토로하고 있다. 「고난(苦難)」이란 글에서는 "나는 몹시도 빈궁(貧窮)하기를 바랐다. 난관(難關)이 많기를 바랐다"고 하면서 "사람의 마음은일대난관(一大難關)에 처하여야 비로소 그의 마음에 진보를 발견한다"는 대목에서는 마치 수도자(修道者)의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이어 "봉명(鳳鳴)을 들은 지 이에 이미 수천 년. 일월(日月)은 영전(永轉)칸만 성인(聖人)은 불귀(不歸)로다. 덕은 버려지고, 사람은 죽어져 삼천세계(三千世界)도 심판의 날이 가까웠으리, 때의 부패된 날짜도 길어졌도다. 세인(世人)은 어찌타 진화의 미명(美名) 속에 멸망의 사실이 배태(胚胎)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가"라는 유장한 문장은 철인(哲人)의 풍모마저 풍기도 있다.

한편 「남창일속(南窓一束)」은 맛깔난 장편(掌篇) 소설이나 다름없고, 「화강소요부(花江逍遙賦)」는 고향을 옮겨 가서〔移鄕〕본 첫인상을 노래한 글로 산문과 운문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절창(絶唱)이다.

우현의 기행문(紀行文)은 미술평론가 최열이 잘 지적했듯이 "답사의 즐거움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힘은 오랜 옛 선비들이 숱하게 남긴 기행문인 「유기(遊記)」의 산문 전통에서 비롯하는 대물림"이라 하겠고, 그 전통은 앞으로도 이어져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의사금강유기(擬似金剛遊記)」와 「사적순례기(寺蹟巡禮記)」그리고 「고구려 고도(古都) 국내성(國內城) 유관기(遊觀記)」가 바로 그러한 글들이다.
 

   
▲ 우현의 젊은날 감성을 엿볼수 있는 소묘와 단상4.


한편 이미 잘 알려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나 「경주기행(慶州紀行)의 일절(一節)」 그리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글은 늘 새로이 곰곰 새겨 보아야할 글이라 생각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도 매우 유효한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산도 볼 탓이요, 물도 가릴 탓이라, 드러난 명산(名山)이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아닐 것이며, 이름난 대천(大川)이 반드시 장한 것이 아닐 것이매, 하필 수고로이 여장(旅裝)을 걸머지고 감발하여 가며 사무적으로 찾아다닐 필요도 없는 것이며, 무슨 산 , 무슨 바다에서 전고(典故)를 뒤척거려 가며 췌언부언(贅言附言)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초목산간(草木山間)의 문창(門窓)을 통하여 조석(朝夕)으로 접하고 있는 무명(無名)의 둔덩도 정을 붙인다면 세상에 명산이 아닐 될 것이 없는 것이며, 문전세류(門前細柳)의 조그만 여울이라도 마음을 둔다면 대천이 아닐 될 것이 없나니, 그리는 산이 따로이 명색(名色)이 있을 턱 없고, 그리는 바다가 따로 지목되어 있을 리 없다" <「명산대천」, 『조광(朝光)』 제5권 7호, 1939. 7>


 

   
▲ 개성부립박물관 집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우현.


▲혼탁한 시대 길잡이
우현이 남긴 글들은 시대가 달라졌기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문투가 예스럽고 어려운 한자말이 많아 겁부터 날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열의 말대로 "하지만 그윽한 어느 날 밤 이 책을 펼치고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 갈 때, 그 사람이 내 가슴 안 파고 들어옴을 느낄 수 있을 게다. …"

선생은 식민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간 지식인이다. 숱한 지식인들이 갈 길을 잃은 채 한 글자도 써 내려가지 못하던 그 시절, 선생은 너무도 힘 있게, 너무도 굳게 그 길을 걸었으니, 「아포리스멘(Aphorismen)」에 밝혀 두기를, 조선의 미술이 "누천년간(累千年間)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그것을 문자로 바꿔냈다. 기운은 드세고, 심의는 굳세며, 학문은 드높고, 문장은 심후하여 황홀한 매력이 넘치는 이 책은, 그러므로 식민지의 창백한 지식인이 내뱉는 냉정의 소산물이 아니라, 선생 스스로가 고백한 바처럼 끝없이 타오르는 생명의 약동이 넘실대는 청춘의 고백이요 심령의 울림 그대로다. <최열, 「심후한 문장, 황홀한 유혹」/《우현 고유섭 전집》9 『隨想 紀行 日記 詩』, 열화당, 2013. p.15>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