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 맞선 올곧은 신념 … 한국건축미술사 씨앗 뿌려
식민사관 맞선 올곧은 신념 … 한국건축미술사 씨앗 뿌려
  • 김진국
  • 승인 2013.10.15 00:00
  • 수정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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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14 '조선건축미술사 초고' 젊은 꿈이 세우고자 한 이 땅의 건축미술
   
▲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이 곳은 수원8경 중 하나로 정조대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인천일보 자료사진


이십대말 집필 미완성 유고

1970년대 한국학 연구 활용

시대초월 미학적 기초 마련


오늘날 학문적 그림자 남긴

총독부 조선문화 독점 연구

우현, 개척연구로 극복노력



무르익은 봄. 꽃이 흐드러지게 핀 골짜기, 잘 생긴 바위를 감돌아 흐르는 맑은 물. 빼어난 경치다. 혼자만 즐기기에는 너무나 안타깝다. 하여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보낸다. 부디 사람들이 이 아름다움 경치를 찾아와 즐기기를 바라면서.

이 시조를 읊은 이는 율곡 이이(李珥·1536~1584)다. 그는 서른네 살에 벼슬에서 물러나 황해도 고산군 해주의 석담(石潭)에 은거한다. 두 해 뒤에는 고산구곡을 둘러보며 아홉 군데의 계곡에 이름을 붙였다. 갓머리처럼 생긴 바위는 '관암(冠巖)', 꽃이 흐드러진 계곡의 바위는 '화암(花巖)', 푸른 병풍이 둘러친 듯한 계곡은 '취병(翠屛)', 이렇게 구곡은 송애(松崖), 은병(隱屛), 조협(釣峽), 풍암(楓巖), 금탄(琴灘)을 지나 문산(文山)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마흔세 살에는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으니 주희(朱熹)의 '무이정사(武夷精舍)의 대은지병의의(武夷大隱屛之義)'를 좇은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여 산수(山水) 사이에 노니는 것은 선비의 이상이었다. 그런데 율곡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벗님네'는 도(道)를 같이하는 붕우(朋友)를 가리킨다. '논어'에도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悅乎)"와 같은 맥락이다. 선비에게 반가운 친구는 도를 같이하는 친구이지 세속적인 이익을 논하고자 하는 무리〔黨〕는 오히려 배척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여 율곡의 골짜기 아홉구비를 거니는 행위는 단순감상을 위한 유람이 아니었다. 학문이 깊어지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다. 마치 주희(朱熹)가 그랬던 것처럼. 위 시는 우현 고유섭이 '조선건축미술사 초고'란 이름의 유고에 서시(序詩)로 삼은 것이다.

『조선건축미술사 초고』는 우현 고유섭의 미발표 유고를 정리하여 펴낸 것이다. 우현이 남긴 유고를 어떤 이유로, 어떻게 하여 단행본으로 간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우현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미술사학자 황수영(黃壽永)이 1964년 유인본(油印本)으로 펴낸 초간본의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우현(又玄) 선생이 별세하시고 이 년이 지난 해방 익년(翌年)부터 착수한 유고 정리는, 선생이 친히 발표한 주요 논문의 수집과 간행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어 왔었다. 그리하여 작년에 이르러 십칠 년 만에 그 과제가 이루어져, 그 사이 육 책(六冊)의 유저(遺著)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것이 끝날 무렵, 필자는 선생의 미발표 원고의 재정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하여 기본 자료가 될 것을 모아 다시 수 책(數冊)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선생 미발표 원고의 공개는 결코 고인의 뜻이 아님을 짐작하면서도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부문 연구 문헌이 매우희귀한 현실에서 감히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바이다. … 그리하여 제1책으로서『조선건축미술사 초고』를 부인(附印)하였는 바, 책명이 '초고'라고 표시하듯 선생의 이 부분 연구의 습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책의 집필년이 선생의 대학 연구실에서 개성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신 전후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 곳곳에서 혹은 입론(立論)에, 혹은 탑파 연대 추정에 있어서 이보다 늦게 발표하신 논문, 예컨대「조선탑파의 연구」 등과 상이하다는 점을 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선생이 일찍이 이 부문에 착안하시어 현존 유구와 문헌에 대한 주목(注目)과 연찬(硏鑽)을쌓으시던 그 자취를 이 일책(一冊)을 통하여 넉넉히 볼 수가 있다. 해방 이십 년이 되었건만 우리 손에 의한 한 권의 우리 건축사가 없음을 섭섭하게 여기면서 이 초고 일책을 공개하려는 바이니, 독자는 이 뜻을 이해하여 이 책을 대해주기 바란다." <황수영, 『한국건축미술사 초고』(유인본(油印本) , 고고미술 동인회, 1964.>

이에 대해 건축사학자 이강근은 「해제」에서 『조선건축미술사 초고』에 대하여 조선미술사료(朝鮮美術史料)』(유인본, 고고미술동인회, 1966)와 더불어 "한국건축 이해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73년에 출간되어 이십 년간 대학 교재로 사용되다가 1992년에 개정판을 낸 윤장섭(尹張燮)의 『한국건축사』도 『조선건축미술사 초고』 없이는 등장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특히 『한국건축사』의 서설(序說)에서 언급한 한국건축미(韓國建築美)의 특징에 대한 견해는 우현의 두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고유섭이 1940년대 초의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미술문화의 특색'으로 도출한 성과가 1970년대의 한국학 열기를 타고 '한국건축미의 특징'으로 활용되면서, 오늘날까지 시대를 초월한 한국건축미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건축미술사 초고』에 대한 그 동안의 평가는 그리 온당하지 못하다. 『초고』를 완성하지 못한 채 유고(遺稿)로 남겼다고 해서 습작(習作)으로만 보거나, 본격적인 고찰이 아니라거나, 서론상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하는 식의 접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현 스스로가 일궈낸 미학과 미술사에 대한 체계적 지식, 예술론에 대하여 학위논문을 썼던 경험, 전국 유적을 다니며 탑파를 조사했던 열정이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조선건축미술사'를 저술하도록 재촉하였던 것이다. 청년 고유섭은 씩씩하고 진취적인 기상(氣像)과 기백(氣魄)으로 원고지를 메꿔 나가던 중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미 써 놓은 원고 뭉치에 '초고'라는 제목을 달아 묶어 놓고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후속 연구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조선건축미술사 초고』를 장별, 시대별, 주제별, 작품별로 정독해 가면, 십여 년 간의 연구와 글 가운데 '초고'를 완성하기 위하여 연구한 글 등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우현의 쓴 글 가운데서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의 정원을 비교하는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조금 길지만 세 나라의 정원의 특색과 그 차이점을 그 나라의 요리에 비유하여 서술한 내용이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 우현 선생이 그린 방화수류정 복개평면도.


"이제 중국 정원의 특색을 보건대 그 제재로는 산악ㆍ호해(湖海)ㆍ계곡ㆍ폭포 등 가장 기발한 대풍경을 납취(拉取)하여 한 구역 지내(地內)에 자유롭게 요리한다. 정원의 한 국부에는 축석과 석회로 동굴을 모현(模現)시키고 화훼(花卉)를 성식(盛植)하고 장벽에는 황홀한 안상을 베풀며 극단의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격렬한 대조를 초치(招致)하나니, 우리는 마치 음식요리에서 보는 바와 같은 재료의 폭력적 처리를 느낄 수 있다. 이와 대조하여 일본의 정원을 보면 인간이 자연 속에 푹 파묻히고 말려 하는 경향이 있다. 정원이 이미 인공예술인 이상 조산조수(造山造水)의 수법이 없을 수 없으나, 그들은 자연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자연 속에서 하마하면 인간이 썩어 버리지 아니할까 하는 의심조차 나게 한다. 그들의 산수는 고웁다. 그러나 손질이 너무 간 고움이다. 그들은 음식 요리에 있어 자연미를 생채로 살리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우엉[牛蒡] 한 쪽이라도 앵화형(櫻花形)으로, 국화형으로 오리지 않으면 못 견딘다. 정원의 수목을 자라는 대로 두지 못하고 이발을 시키고 면도질을 시켜야만 한다. 산지를 평지로 만들려면 흙을 깎아내린다. 이리하여 그들은 도코노마(床の間)에도 발지분산(鉢池盆山)을 들여놓는다. 이 중간에 있는 조선의 정원예술은 어떠한가. 물론 조선도 조원법(造園法)에 축석으로 방지(方池)를 꾸미고 봉래선장(蓬萊仙丈)을 의(擬)하여 도서(島嶼)를 경영한다. 고석(古石)을 배열시키고 화훼를 심는다. 청벽(淸壁)을 돌리고 누관을 경영한다. 또 동양인의 공통성에 벗지 아니하여 자연을 사랑할 줄 안다. 그러나 그들은중화인과 같이 자연을 요리하지 않는다. 일본인 모양으로 자연을 다듬지 않는다. 산이 높으면 높은 대로 골이 깊으면 깊은 대로, 연화를 심어 가(可)하면 연화를 심고 장죽(丈竹)을 기르기 가하면 장죽을 기르고, 넝쿨이 엉켰으면 엉킨 대로, 그 사이에 인공을 다한 소정(小亭)을 경영하여 들면 들고 나면 난다." <고유섭 전집 제6권 「조선건축미술사 초고」, 열화당, 2010. p.156~7>

우현이 『조선건축미술사 초고』를 쓴 시기는 그의 이십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무렵이다. 잘 알다시피 다른 학문 분야도 그러하지만 '조선건축'에 대한 일제강점기의 각종 조사는 조선총독부의 직간접 지원 아래 일본인에 의하여 독점되었다. 따라서 '조선건축 연구'마저 그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이뤄지는 위기 상황이 초래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사와 연구를 독점했던 일본인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와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1899~2002)였다고 하겠다.

특히 세키노 다다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 수행에 삼십여 년 간 앞장섰던 관학자(官學者)로서 일찍이 1902년부터 우리나라 건축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여 낸 보고서(조선건축조사보고, 동경제대)와, 식민지배 시기에 충실하게 제국주의 문화정책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세키노 다다시의 뒤를 이어 1920년대 초반 한국에 왔으며, 오랜기간 머무르면서 조사한 결과를 『조선건축사론(朝鮮建築史論)』(1930)으로 펴냈을 뿐만 아니라, 1941년에는 세키노 다다시의 연구업적을 『조선의 건축과 예술(朝鮮の建築と藝術)』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 방화수류정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우현이 '건축미술사 초고'를 집필하던 그 때, 그에게는 이 두 사람이야말로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현은 건축미술의 연구를 통해 조선미술의 특색을 찾아 나갔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城砦)로 보였던' 세키노와 후지시마의 저술도 '미학적 기초'를 마련한 우현의 예기(銳氣)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탑파 연구에서 보듯 우현의 양식론(樣式論)에 의해 그 성채 일부가 무너졌다.

그러나 세키노가 세운 '조선건축연구의 제국주의적 학풍과 전통'은 후지시마 가이지로와 스기야마 노부조(杉山信三, 1906~1997)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이강근은 「해제」의 끝에서 말한다.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한국건축사는, 지금도 1902년 세키노 다다시의 연구로 시작되고 후속 일본인 연구자에게 전승되어 온 '그들만의 조선건축사'일 뿐이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한국인이 펴내고 있는 한국건축사에는 여전히 그들의 연구 업적뿐 아니라 그들의 시각이 침투되어 있다. 근대적인 건축사학의 시작을 그들에게 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30년대 초반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조선건축미술사'를 쓰고자 했던 우현의 기개는 따라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본인의 조선건축사'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조선건축미술사 초고』에서 싹을 틔운 '한국건축미술사'의 완성을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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