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신 다한 고탑연구로 민족 자존심 세우다
혼신 다한 고탑연구로 민족 자존심 세우다
  • 김진국
  • 승인 2013.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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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13.'조선탑파의 연구' 조선미술 양식사 탐구 금자탑
   
▲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충남 부여). 백제 석조미술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작품중 하나이다.


한중일 탑형식 입체적 비교

조형문화학계 큰 초석 놓아

日문화 형성 중계역할 주장

일제하 韓미술 자부심 피력



만대의 전륜성왕, 삼계의 주재자로 / 쌍림에서 열반 한 뒤 몇 천 년이 흘렀는가 / 진신사리 지금까지 오히려 남아 있어 / 널리 중생에게 예불 멎지 않게 하네.

-양산 통도사 대웅전 주련에 새겨진 자장율사의 '불탑게(佛塔偈)' 



1943년 6월10일, 우현 고유섭은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일본제학진흥위원회(日本諸學振興委員會) 예술학회에서 「조선탑파의 양식변천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이미 간경화증을 앓고 있던 우현은 도쿄에서 열린 이 발표회에서 지금껏 조선탑파에 대한 연구 결과의 핵심사항인 양식변천 문제를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혼신을 다해 자기 견해를 펼쳤다. 예정된 발표시간을 넘겨 사회자가 시간을 끊겠다고 선포하여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말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을 만큼.

"조선도 대륙과 일본 사이에 개재한 불교국의 일원으로서 일찍이 가람건축에 국탕(國帑) 민력(民力)을 경주하여 탑파건축에 하나의 수이상(殊異相)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두세 학자에 의하여 주의된 이외에는 이렇다 할 명쾌하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설명을 볼 수 없었다. 이는 새로운 의미에 있어서 일본의 고문화가 반성되고 새 건설이 기도되고 있는 금일, 하나의 유감됨을 면치 못한다. 하물며 조선은 과거 일본문화 형성에 지대한 중개역을 하였음에 있어서랴!"

이 요지를 당시 일제 강점기, 그것도 말기적 상황임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조선미술에 대한 자부심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편 1948년에 유저로 간행된 『조선탑파의 연구』의 '초판 서문'에서 월북 미술가 이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분황사모전석탑(국보 제30호·경북 경주). 가장 오랜 신라 탑으로 신라 석탑양식의 근원을 알려준다.


"조선의 석탑파(石塔婆)는 우리의 조형문화를 크게 빛나게 한 한 개의 자랑거리로서만이 아니라, 세계 건축사상(建築史上)에 우수한 엔데믹 폼(endemic form·독특한 형태)을 보여주는 한 경이적인 존재이다.…그러나 동방 삼국의 탑파를 논할 때 중국의 전탑(塼塔), 일본의 목탑(木塔)을 조선의 석탑(石塔)과 병칭하며 흔히 평면적으로 각각 그 특징을 설명하고자 해 왔다.…그의 학문적 유업(遺業)으로서 특히 빛나는 『조선탑파의 연구』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아나누마 준이치(天沼俊一),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오하라 도시타케(大原利武 ),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 노무라(野村), 스기야마 신조(杉山信三) 등 제씨의 연구보다도 한층 완벽한 것이 있으며, 특히 양식론에 있어서의 탁월한 견해들을 피력한 것은 학계에 끼친 불후의 업적인 바, 그의 이 유저가 있음으로써 우리 조형문화학계는 한 개의 굵은 초석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어지러운 병선과 사나운 파괴 속에서도 우뚝 서 있는 조선의 석탑파는 모든 파괴자를 저주하면서 이 땅의 문화학도(文化學徒)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혜성과 같이 나타난 선구자 고유섭이 그 탑들을 어루만져 보았을 뿐, 또 그 뒤에 누가 있어 그것을 찾아보았는가. 꾸준히 이어 대고 줄기차게 배워 갈 생각들을 가지는 것이 고인의 바람일 것이요 우리 문화학도들의 사명일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편 탑파 연구를 전공으로 하는 미술사가 강병희는 우현이 『조선탑파의 연구』(2010년, 열화당)에서 보여준 학문적 방법론과 그 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유섭의 탑파 관련 저술들에서는 무엇보다도 양식론적 방법론이 부각된다. 그리고 양식사를 중심으로 정신사ㆍ문헌사ㆍ역사ㆍ고고학 등을 적절하게 통합하여 연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애초에 기획했고 염원했던 조선미술사 집필의 초기 작업으로 시작되었지만, 석탑 연구사에서 혹은 미술사 연구 방법론에서 끼친 영향이 실로 지대하며 그의 연구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연구에서 보여준 양식사적 방법론은 정치하고도 정밀하여 오늘날까지도 부분적인 자료 보완은 있었지만 그 큰 틀은 유지되고 있다. 그의 탑파 연구는 양식사를 토대로 했지만그것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으며, 한편 다양한 분야와 시각의 연구 성과를 적용하였으나 결코 양식사적 판단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아울러 강병희는 『조선탑파의 연구』에서 다루어진 대상이 통일신라시대에 한정되고 있는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고유섭의 탑파 연구는 그의 학문 활동 전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930년 3월 경성제대 졸업 후 대학 미학연구실에서 조교로 근무하면서 시작된 탑파 연구는 서거하기 전해인 1943년 6월 도쿄에서 개최된 문부성(文部省) 주최 일본제학진흥위원회에 예술학회에서 「조선탑파의 양식변천」을 발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는 학술활동 및 논문발표도 끝을 맺기 때문이다.

우현의 탑파 연구의 발자취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930년 4월 전국의 탑을 조사하기 시작하여 1932년 1월『신흥』6호에 「조선 탑파 개설」을 발표했다.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한 이후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 1934년에는 경성대학 중강의실에서 「조선의 탑파 사진전」을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었고, 이후 1935년에「조선의 전탑(塼塔)에 대하여」(『학해(學海)』2집)를, 1936년 11월 『진단학보』6권에「조선탑파의 연구」1회분을, 1938년 9월 『고고학』9권 9호에 「소위 개국사탑(開國寺塔)에 대하여」를, 1939년 3월 『진단학보』10권에 「조선탑파의 연구」2회분을, 같은 해 7월 『고고학』10권 7호에 「'소위 개국사탑에 대하여' 보(補)」를, 1940년 『진단학보』14권에 「조선탑파의 연구」3회분을, 1943년 『청한(淸閑)』15호에 「불국사(佛國寺)의 사리탑(舍利塔)」을 발표했다. 특히 앞서 서술한 1943년 6월10일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제학진흥위원회 예술학회에서의 발표논문「조선탑파의 양식변천」은 『일본제학연구보고(日本諸學硏究報告)』제21편(예술학)에 수록되었다.

이와 같은 탑파 연구에도 불구하고 탑파에 관한 단행본 출판은 1944년 6월26일에 우현이 마흔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생전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탑파의 연구』는 우현 사후 1938년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발간된 이래, 1975년 동화출판공사에서, 그리고 1993년에 통문관에서 각각 출간 되었다. 그런데 세 차례에 걸친 이 출판물은 각기 내용과 구성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2010년에 열화당에서 '우현고유섭 전집'의 제3ㆍ4권으로 펴낸 『조선탑파의 연구』는 상권(총론편)과 하권(각론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쪽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탑이다. 현재는 해체복원중.


최종 완결본이라 할 열화당의 『조선탑파의 연구』를 텍스트로 삼아 그 내용을 간추려 살펴보기로 한다. 상권(총론편)에는 『진단학보』에 세 차례에 걸쳐 발표된 「조선탑파의 연구」(1936~1941)가 제1부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일문으로 집필했던 또 다른 「조선탑파의 연구」(1944)가 제2부로, 그리고 일본 문부성 주최 일본제학진흥연구대회에서 발표한 「조선탑파의 양식변천」과 그 요지가 제3부로 묶여 있다.

제1부 「조선탑파의 연구 1」(1936~1941)은 크게 탑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목탑ㆍ전탑ㆍ석조탑으로 나누어 서술했다. 목탑과 전탑은 한정된 시기에 소수의 유물이 남겨져 있는 까닭으로 문헌과 유물들을 중심으로 발생과 역사적 변천을 서술했다. 석탑은 먼저 목탑이 전래된 후, 백제에서는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신라에서는 전탑을 본뜬 모전석탑이 조성됐으며, 이 두 계열의 양식이 통합되고 새롭게 변모하여 독특한 우리만의 석탑양식이 성립되는 과정을 양식사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어 여러 탑들의 다양한 편년 자료를 검토해 시원양식은 삼국시대로, 전형양식은 통일신라 중대 전기 즉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로 그 시대를 나누어 정리하였다.

다음으로 양식적으로 시원양식과 전형양식의 뒤를 잇는 작품들을 제삼기 작품군으로 분류하여 양식적 특징, 그리고 조성 시기를 검증했다. 그것들은 양식적인 면에서는 전형양식과 대동소이하지만 규모가 작아지며 장식적 의미가 가미되는 특징이 있으며, 조성 시기는 중대 후기인 효성왕부터 혜공왕대로 설정했다.

마지막으로 이후 신라 말기의 석탑들에서 전형양식의 틀을 벗어나는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 모전탑(模塼塔)과 같은 특수한 탑들의 양식, 시대편년, 양식 발생의 의미 등을 서술하고 있다.

제2부는 본디 출판을 위해 준비한 글인데, 이 책에서는 총론만을 담았다. 총론은 제1부의 내용에 탑파의 정의, 불교의 전래, 사원과 탑, 사리와 탑에 관한 연구에 수반되는 필수적인 개론을 앞부분에 첨가했고, 재료별 고찰에서 공예탑 부분을 신설했다.

제3부「조선탑파의 양식변천」에서는 목탑ㆍ전탑ㆍ석탑에 이르는 조선 탑파의 양식 변천을 논증하고 있는데, 제1부와 제2부에 실린 석탑의 양식변천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다만 신라 말기의 이형석탑에 관한 논술을 고려시대의 탑ㆍ부도 등과 비교하는 등, 양시적인 흐름을 좀더 구체화시켰다.

하권(각론편)은 우현이 생의 마지막까지 출판을 위해 준비 중이었던 「조선탑파의 연구」(1944) 중 각론 부분 38기(基), 그리고 그 밖의 자료로 남겨진 68기의 탑파들을 낱낱에 대한 서술을 각각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 싣고 있다. 제1부 「조선탑파의 연구 각론1」에서는 각 항목의 순서도 총론 서술에 따라, 후대의 예라도 목탑의 예를 앞세우고, 이어 석탑들을 시원양식, 전형양식, 제3기 작품, 신라말 이형양식(異形樣式) 순으로 배열했다. 제2부 「조선탑파의 연구 각론 2」에서는 탑과 연구를 위해 수집한 자료 중 제1부에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 68기의 자료가 편집되어 있다. 여기에는 많은 고려시대 탑들과 일부 승탑(僧塔)도 포함되어 있어 그가 수행하고자 했던 연구의 범위를 짐작케 한다. 이 책에서는 우현이 답사 시에 첨부하여 그러 놓은 그림들까지 관련 사진자료와 함께 수록하여 자료적인 가치를 더욱 높였다.

다만 이 책 제2부의 각론들은 출판을 위해 정서(淨書)되지 않은 연구 자료로, 이들 중에는 간혹 관련 양식에 관한 견해가 정리가 안 된 듯, 훗날 유사한 양식을 가지고 있는 유물과의 비교를 기약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각론 서술에서는 방대한 문헌자료의 섭렵과 적용, 중요 변화의 흐름을 대표하는 양식의 문법적 파악을 위한 엄밀한 양식사적 판별, 뛰어난 미적 직관력 등이 돋보인다. 우현은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조선왕조실록』등의 정사류(正史類)는 물론『동국여지승람』등의 지리지, 사찰에 남아 있는 기록, 각종 금석문, 일부 문집 등의 방대한 기록들을 찾아방증자료로 삼고 있다. 실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당시 교통 여건을 감안한다면 탑파 연구가 얼마나 힘든 고행길이었는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겠다.

"요컨대 하늘은 신념을 가진 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며, 신념이 있는 곳엔 무엇인지에 의하여 또 행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조선 탑파계는 실로 이 석탑의 창조 때문에 행복을 받았다고 하겠다."
<고유섭 전집 제3권 조선탑파의 연구上, 열화당, 237p.>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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