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9. 한국미술사 연구에 첫걸음을 내딛다


 

   
▲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교시절, 경성제대 교정에서, 1933년 3월. (왼쪽에서 네번째가 우에노 나오테루 교수, 그 오른쪽이 고유섭, 맨 오른쪽이 나카기리 이사오)     



졸업 후 미학연구실 조수 임명
미술사 연구로 흥미 옮겨가 

사진실 협력 바탕 석탑 연구
고미술 사진전 성공적 개최 

옛 문헌 토대 회화사 자료 정리
교수에 논문 집필 종용 받기도



지닌 뜻 확고하지 않다면/가는 이 길 그 어찌 순탄할쏘냐/언제나 두려워라 중도에 변해/뭇사람 웃음거리 되지 않을지(秉志不堅確 此路寧坦夷 常恐中途改 永爲衆所嗤) - 다산 정약용, <술지(述志)>에서



우현 고유섭은 1930년 3월 31일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나이 26살 때이다.

그리고 4월7일, 경성제국대학 미학미술사연구실 조수로 첫 출근했다.

사회인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오, 학문의 길에도 첫걸음을 시작한 셈이다.

고유섭의 1929년 11월4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흥미롭다.

우에노(上野) 교수를 찾아 결혼한 이야기와 취직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더니, 될 수 있는 한 연구실에 남아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였다.


조수 일 년 내에 서양미술사를 하나 쓰고, 이 년까지에 경주 불국사(佛國寺) 연구 및 불교미술사(佛敎美術史)를 연구하자. 


졸업 후의 진로 문제를 상의한 점과 경성제대 법문학부 미학연구소 조수에 임명되면 본격적인 미술사 연구를 하겠다는 당찬 계획과 포부를 적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유섭이 경성제대 미학연구소 조수에 임명될 수 있었던 배경과 그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단편적인 증언들이 있다.

그 하나가 미학연구소에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고유섭과 우정을 나누었던 나카기리 이사오(中吉功)의 기억이다.

그는 고유섭 서거 20주기를 맞아 우현의 제자인 황수영(黃壽永)에게서 추억기(追憶記)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고유섭씨의 추억(高裕燮氏の思い出)>이란 제목으로 글을 써서 보내왔다.

이 글은 다른 사람들의 추모 글과 함께 <고고미술(考古美術)>지(誌)에 실렸다.

원문은 일어로 실려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풀어서 옮기도록 하겠다.


고유섭씨와 나와 아는 사이의 시작은 1928년 4월의 일이었다.
내가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미학미술사연구실에 처음으로 봉직(奉職)할 때, 고유섭씨는 미학전공의 2학년 학생이었을 뿐이었다.
보기만 해도 조용하고 온화한 사람이어서 대인의 풍격(風格)이 몸에 밴 대학생이었다.
주임교수인 우에노 나테루(上野直昭) 선생(당시 연구실에는 선생 한 분뿐이었다)에게 소개받게 될 때 참으로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직관하였지만,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않고 교제하는 중에 점점 고유섭씨의 그윽하고 고상한 사람됨에 매혹되게 되었다.
서로 흉금을 열고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고, 조선인라든가 일본인이란 그런 구별하는 일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고 어느 사이에 형제처럼 친밀함이 솟아나게 되었다. …줄임…
이윽고 3학년에 오를 무렵, 우에노 선생의 지도 아래 졸업논문에 착수하며 피들러의 미학사상에 관한 논문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 보았는데, 정말로 달필인 원고에 놀라고 조리가 통하는 논고에 감심(感心)한 것을 잊을 수 없다.
1930년 3월, 개학 최초의 미학미술사 전공의 졸업생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일본에서도 미학전공으로는 취직도 막연하고 겨우 목숨만 이어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었다.
조선에서는 역시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 고유섭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나는 넌지시 속내를 떠보았지만 고유섭씨는 깊게 마음에 기약한 바가 있었다고 보여, 그다지 생활이 안 되는 것은 이미 각오가 되어 있어서 미학을 전공한 것이라 상상된다.
졸업 전에는 동경제대 문학부 미학과에 다시 입학을 희망하고 있었다고 우에노 선생에게서 들었지만.
그것은 가정의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고, 전임인 와타나베(渡邊) 조수가 군대에 입대하였기 때문에 잠시 공석이 된 미학연구실의 조수(助手)로 우에노 선생이 주선하여 때마침 임명되어서 나는 겨우 안심 하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뒤 1933년 3월까지 만 3년 조수로서 재임하고 나도 함께 추억이 깊은 연구실 생활을 보낸 것이다.
이 3년간 고유섭씨의 학문적 흥미는 미학에서 구체적인 미술사 연구로 옮겨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고유섭씨가 대학 2학년 2학기를 마칠 무렵, 다나카 토요조(田中豊藏) 선생이 구주(歐洲)에서 조선으로 돌아와서 한 동양미술사 특강에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된다.
게다가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선생도 한 주에 한두 번 연구실에 출석하여 조선 고대문화의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고유섭씨의 마음 바닥에는 자국(自國)의 고미술에 특별한 반성심을 불러일으키고, 억누를 수 없는 연구의식을 북돋웠기 때문은 아닌가라고 추측된다.
<<考古美術> 제5권, 제6·7호/ 통권47·48호(1964.6·7.)>

   
▲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교시절의 고유섭

그의 추억은 이어진다.

그는 한국에 머물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고유섭과 사이에 싹 튼 우정은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벽을 넘어 공동의 관심사인 조선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자는 데도 뜻을 같이했다.

그 의욕을 북돋운 것은 당시 조선미술사는 거의 황무지와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젊은 그들에게 도전의 투지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카기리는 신라의 불상에서 시작하고 고유섭은 신라의 석탑을 연구하기로 한다.


"당시 조선미술사라고 하는 말은 그다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지 않았고, 겨우 조선사학회 발행의 <조선미술사강좌(朝鮮美術史講座)> 중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박사가 집필의 간단한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의 시리즈가 있는데 지나지 않아, 전혀 미개척 분야에 다름없는 시대이었고, 물론 전문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고유섭씨와 나와는 이심전심, 함께 조선미술사 연구에 나아가게 되었다.
우선 두 사람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패기를 가지고 후미진 사찰이나 유적을 찾아가고, 불상과 석탑의 사진을 분담하여 모으는 일도 하고, 다행히 사진실에 이마세키 고우후(今關光夫), 엔조지 이사오(円城寺勳)이라는 두 사람의 엑스퍼트가 있으므로 즉시 협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미술사의 연구는 현재도 같은 모양이지만, 편의상 사진을 필수로 요구된다.

나카기리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다행히 경성대학에는 사진실이 있고 주임교수인 우에노 선생의 직접 감독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고유섭씨의 석탑연구에는 무엇보다도 좋은 형편으로 더할 나위없는 행운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당시 사진실에는 엔조지 이사오(円城寺熏)라고 하는 경쟁심 강한 사람이 있는데, 원만성(圓滿性)을 결한 성격이었으나 천성은 단순하고 이상하리만큼 고유섭의 인품에 반해 그의 석탑연구에 전면적으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행운이었다.

"이는 고유섭씨에게 있어서 잠룡(潛龍)이 비를 얻어 하늘에 오르는 것과도 같고, 두 번 다시없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나카기리는 회상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고유섭의 연구는 엔조지 이사오(円成寺熏)의 기술적 협력에 의해서 더욱더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어느 덧 2,3년 내에 노력한 보람도 있어서 주목할 만한 석탑의 사진이 많이 모아졌으므로 1934년 3월, 그 중간적 성과를<조선의 뛰어난 사진을 펼쳐 보임(朝鮮の寫眞展觀)>로서 대학의 중강의실을 전시회장으로 삼아 전시하였다.

의외로 평판이 좋아 이번에는 미츠코시(三越)의 갤러리(1930년에 문을 연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안의 갤러리, 현재 서울 소공동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관)를 빌려서 석탑을 중심으로 한 고미술사진전(古美術寫眞展)을 개최했다.

이것은 주로 고유섭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 역시 나카기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이는 평소 고유섭씨의 성실한 연구가 열매를 맺은 것으로 잊을 수 없는 업적이다.
이와 같은 고유섭씨의 연구는 한 걸음 한 걸음씩 그 발판(地盤)을 쌓고, 이윽고 세키노, 후지시마 두 박사의 건축가적 그것(안목)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문헌적 예술사적이며, 독자적이기 때문에 연구가 사계에 인정된 것이다.
그것은 <불국사의 사리탑>(1943년), <조선의 전탑에 대하여>(1935년), <소위개국사탑에 대하여>(1938년) 등의 여러 논문에 의해 알 수가 있다."


   
▲ 미츠코시(三越)백화점 경성점(현 신세계백화점 본관), 1930년대. 이 백화점 갤러리를 빌어 고유섭 등은 조선탑파와 관련된 사진전을 열었다.


고유섭이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수로 재직하면서 학문에 정진에 했던 것 중 다른 하나는 바로 우리의 옛 문헌에서 회화사 관련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당시 일제에 의해 경성제대 도서관으로 옮겨져 보관된 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 등 옛 문헌에서 조선회화에 관한 기록을 일언반구(一言半句)라 할지라도 빠뜨리는 것 없이 발췌(拔萃)하여 손으로 써서 기록하였다.

그 성실한 끈기는 도저히 일반사람은 할 수 없는 노력의 연속으로, 여름의 더운 더위 속에서도 겨울의 엄동에도 이어졌다.

특히 한문에 뛰어난 고유섭은 매우 빠른 속도로 문헌을 독파하고 이것을 발췌(拔萃)하고 있었다.

요즘과 달리 복사시설이 없던 시절,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써서 베껴내야 하는 참으로 고된 작업이었다.

이 일은 1938년 고유섭이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해서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무렵 고유섭은 일주에 한 번씩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미학미술사를 강의하기 위해 개성에서 경성을 오갔다.

그는 상경할 때마다 나카기리의 명의로 대학도서관에서 조선의 문집을 대출받아서는 그것을 개성에 갖고 가서 발췌하고, 또 다시 다음 주에 책을 반납하곤 하였다.

나카기리는 이 일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3, 4년이나 계속되었다고 기억한다.
아마도 그 당시 발췌한 원고는 수 척(數尺)에 이르러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일 고유섭씨가 장수했다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명저에 이어지는 조선화인전집성(朝鮮畵人傳集成)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책이 몇 권 간행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무래도 유감이다."


고유섭이 미술사 연구를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이미 다나카 교수는 알고 있었고 그 기대하는 바가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조선회화에 대한 논문집필을 종용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전문지에 추천하기도 하였다.

즉 미술전문지 《화설 畵說》에 게재된 <승철관(僧鐵關)과 석중암(釋中庵)>(1937)이며, <수구고주>(1938)등이 그런 과정을 거쳐 집필된 것이다.

다음으로 <안견(安堅)>, <안귀생(安貴生)>, <윤두서(尹斗緖)>(1938) 등의 화인(畵人)에 대해서 출판사 후잔보우 (富山房)의 <국사사전(國史辭典)>에 실렸다.

경성제대에서 보낸 조수 생활 3년은 학문적으로는 미술사연구에 매진하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생활면에서는 고난스런 삶이었다.

그의 <일기>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이 그것을 보여준다.


졸업 후 처음으로 급료를 받다. 6급봉(給俸)에 하루는 사령장(辭令狀)이 나온 날이라 빼고 71원 78전이 나오다. (1930년 4월21일)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의 상여금 96원이 나오다.(1932년 12월15일)
성대(城大) 조수의 사임장이 나왔다.(1933년 3월31일 부)
삼년간의 조수생활도 이로써 끝을 막았다. 눈코를 바야흐로 뜬 업을 버리고 사회에 던져진 몸이 되련다. 또한 추창한 바 없지 않다.(1933년 4월1일)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