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자율성 '학문의 道' 삼은 미학세계 안내자들
보편·자율성 '학문의 道' 삼은 미학세계 안내자들
  • 김왕표
  • 승인 2013.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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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8. 고유섭과 경성제대의 선생들 배움의 길 - 네번째 
   
▲ 1929년 경성제대 교수 연구실에서. 왼쪽부터 고유섭, 다나카 도요조 교수, 나카기리 이사오, 우에노 나오테루 교수.


독일 유학파 우에노 나오테루

우현에 근대미학·미술사 전수

졸업후 연구조수 채용 도와줘



경성제대, 식민지 권력대상 포착

학문분과 개설 … 일부 교수·학자

개인자율성 중시 반대성향 가져



나보다 앞서 태어나서 도를 들음이 진실로 나보다 먼저라면 내 따라서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요, 나보다 뒤에 태어났더라도 도를 들음이 나보다 먼저라면 내 따라서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도를 스승으로 삼으니, 그 나이가 나보다 먼저 태어나고 뒤에 태어남을 어찌 따지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신분의 귀천도 없으며 나이의 많고 적음도 없고 도가 있는 곳은 스승이 있는 곳이다. <한유(韓愈), 사설(師說)에서>

 

   
▲ 경성제대 시절 우에노 교수의 강의 모습 .


▲우에노 나오테루
우현 고유섭이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재직하고 있을 때, 경성에서 신문기자가 찾아와 직접 인터뷰 한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대학에서 미학(美學)이라고 해서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를 연구하겠다고 했더니 담임 교수의 말이, "네 집에 먹을 것이 넉넉하냐"고 묻습디다. 그래 먹을 것이 있기보다도 간신히 공부를 할 뿐이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틀렸다. 이 공부는 취직을 못 해도 좋다는 각오가 있고, 또 돈의 여유가 있어야 연구도 여유 있게 할 수 있는데…" 하며 전도(前途)를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을, 이왕이면 내가 할 공부이니 취미 있는 대로 하고 싶은 공부나 해보자고 한 것이 이 공부인데, 요행이라 할지 이 박물관에 책임자로 있게 된 것만은 다행이나, 어디 연구하려야 우선 자료난(資料難), 즉 우리가 보고 싶은 것, 조사하고 싶은 것 등이 용이(容易)히 우리 손에 안 미치는 것을 어찌합니까……. <『조선일보』,1937년 12월12일~13일/『우현고유섭전집』9, p.301~305 >

그 때 담임교수는 바로 미학을 가르쳤던 우에노 나오테루(上野直昭) 교수이다.

우에노는 심리학을 전공했으나 동경제대에서 일본의 일 세대(一世代) 미학자라 할 수 있는 오쓰카 야스지(大塚保治, 1868~1931)와 러시아인 쾨베르(R. von Koeber)의 미학강좌를 수강하면서 미학에 발을 들여 미학연구실 조수로 일했으며, 1913년에 설립된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의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학자 이인범은 '해제(解題) : 고유섭 학문의 위치, 그리고 그의 미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유섭의 학문의 성립과 전개를 서구 근대미학뿐만 아니라 그 수용을 통해 성립된 일본 근대 미학의 전후 사정과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1927년 경성제대에 미학ㆍ미술사 전공이 개설되어 미학 담당교수로 부임한 우에노 나테루(上野直昭, 1882~1973)와의 만남은 주목할 만하다. 우에노는 "구체적인 미술현상과 추상적인 이론을 결합하여" "미학을 미술사의 재료에 따라, 미술사를 미학의 관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한 그의 입장은,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자격으로 유학하여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피들러의 영향 아래 있던 힐데브란트(E. Hildebrandt, 1872~1939) 등을 청강했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경성제대에서 미학개론·미학특수강의·미학연습·서양미술사·강독연습 등을 강의했으며, 미학·미술사·고고학 공동연구실을 구성하기도 했다."

한편 고유섭의 「일기」(1929년 11월4일) 가운데도 "우에노(上野) 교수를 찾아 결혼한 이야기와 취직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더니, 될 수 있는 한 연구실에 남아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1930년 2월25일자 일기에는 "우에노(上野) 교수 도구(渡歐) 기념사진을 찍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부인인 이점옥 여사의 가필로 추정되지만 "날짜는 기억이 없지만 우에노(上野) 교수가 교환교수로 독일로 떠났다. 우에노 교수가 가위 등 몇 가지를 사 보냈다. 우에노 선생이 나온 날도 잘 모른다"는 내용이 있고, 같은 해 4월26일자 일기에 "오늘 날씨가 좋다. 우에노(上野) 선생 부인을 방문하고 그 길로 혼마치(本町)에서 책을 사가지고 인천에 내려오다"는 내용도 볼 수 있다.
 

   
▲ 미학연구실 조교시절, 우에노 교수와 함께.


그리고 1931년 12월19일(음 11월11일)의 일기에는 "우에노 선생이 개성으로 가면 공부도 하고 좋으니 가라 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고고미술동인회(후에 한국미술사학회로 발전) 가 간행한 『고고미술(考古美術)』[제5권, 제6·7호/ 통권47·48호(1964. 6. 7)]에서 고유섭의 서거 20주기를 맞아 추모하는 글들을 싣고 있는데 그 가운데 우에노 교수의 '고유섭군'이란 글이 있다. 일문(日文)으로 된 글이기에 여기서는 풀어서 일부를 옮겨 적는다.

내가 유럽에서 돌아와 경성대학에 부임한 것이 개학에서 1년 늦은, 1927의 4월이었고, 전해인 1926년에 대학이 문을 열었다. 학생은 이미 2회째 입학이었고, 그 안에 고유섭군이 있었다.
처음으로 군과 만난 것은 나의 부임 후 겨를도 없이, 교관 학생의 합동회의로 수원(水原)에 하루치기로 돌아오는 그 유람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신입생이었던 군이 소개되었다. 그때 이미 상당한 수재이라는 연유를 듣게 되고, 또 미학을 전공할 예정이라 말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3년간은 학생으로서, 군의 졸업논문을 심사하였지만 이것을 마치고, 나는 다시 유럽에 건너가게 되어, 1931년 가을 다시 경성(京城)에 되돌아왔을 때는 군은 이미 개성의 박물관장이 되었기 때문에 없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군은 대단히 공부하는 것 같은데, 탑에 관한 저서를 빌려간 기억이 있다. 경성대학에는 반도에서 태어난 학생은 우수한 이가 적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고군은 특히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벌써 30년 전의 일이 된데다, 나도 늙었으므로 많이 잊어버렸지만, 개성의 박물관으로 군을 방문한 적이 한번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날 뿐이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잊어버렸다. (1964. 6. 14.)

당시 경성제대 미학연구실에 조수로 근무하며 고유섭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던 나카기리 이사오(中吉功)가 기억하는 당시 수업 상황을 풀어서 옮겨본다.

1928년도의 우에노 선생의 미학개론(美學槪論)의 강의에는 청강(聽講)학생은 꽤 많아서, 그 가운데 뒷날의 영문학자 한양대학교 교수인 고 최재서(崔載瑞, 1908~1964)씨가 있었다. 그러나 강독연습(講讀演習)에는 전공학생 고유섭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다음해 타나카 선생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강독연습에는 고유섭 이외에 뒤에 서울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된 박종홍(朴鍾鴻)씨가 참가하여 왔다. 어떤 이유인지 일본인 학생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또 같은 해의 다나카 선생의 특수강의 「영락조미술사(寧樂朝美術史)」에는 학생으로서는 고유섭씨 한 사람뿐이고, 뒤에는 하야미 히로시(速水滉), 아베 요시게(安倍能成), 미야모토 가즈요시(宮本和吉), 후지타 료사쿠(藤田良策)의 여러 선생이 학생 의자에 나란히 앉아 모두 열심히 청강하던 정경은 실로 기관(奇觀)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강의는 암막(暗幕) 설비가 있는 커다란 심리학교실을 사용하였으므로 불과 다섯 사람 정도로는 빈 자리(空席)뿐으로 실로 황공한 이야기이다.

나카기리는 환등기를 다루면서 이와 같은 충실한 강의에 왜 학생이 모이지 않는 것인가라고 섭섭하게 생각했다. 또한 우에노 선생의 「서양미술사」강의도 학생이 적어 매년 열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1939년에는 4~5명의 학생으로, 현재 쥬우오우대학(中央大學) 학장인 시마자키(嶋崎昌)씨가 당시 동양사(東洋史) 조수로서 특별히 청강하러 왔다.
 

   
▲ 다나카 도요조 교수와 함께



▲다나카 도요조
미학자인 우에노 교수와 더불어 고유섭을 애제자로 아끼고 또 미술사 연구로 이끈 선생은 미술사가인 다나카 도요조(田中豊藏, 1881~1948)교수이다.

그는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동경미술학교(現東京芸大)의 강사를 거쳤으며, 1928년 경성제대 교수를 지냈으며 역시 인도와 중국에 유학을 다녀왔다. 전후(戰後)에는 문부성 미술연구소장이 되고 동경도미술관장(東京都美術館長)도 겸했다. 저작에「동양미술담총(東洋美術談叢)」등이 있다. 역시 나카기리의 회상에 의하면 고유섭의 진로문제에 대해서 도움을 주고자 했고 나중에 개성박물관장 시절에는 나카기리와 함께 고유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후지타 료사쿠
한편 고고학을 가르친 교수는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1892~1960)이다. 그는 당초 의사가 되고자 동경제국대학 의대에 지원, 합격했으나 근시 때문에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국사과로 전과해, 사학자 구로이타 가츠미(黑板勝美)의 지도를 받았다.

한국과의 인연은 졸업 후 유신(維新)사료편찬사무소 촉탁으로 근무하던 그를 1922년 스승 구로이타가 조선총독부 주관 고적조사사업의 조사위원으로 추천한 데서 시작했다. 1923년에는 조선박물관 협의위원이 되었고 총독부 학무국 박물관주임이 됐다. 이후 1926년 경성제국대학 조교수가 되었으며 곧 청구학회의 창립에 관여했다. 후지타 선생은 1928년 여름이래, 총독부 주임을 함께 맡아 주 2회 출석하였다.

1932년에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조선사를 담당했다. 이후 조선사편수위원,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해방이후 일본에 건너간 뒤에는 일본고고학회위원장(1948년), 천리대학에서 결성한 조선학회 간사(1950년),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1959년) 등을 지냈다.


▲관학아카데미즘에 대한 경계
고유섭이 경성제대를 다닐 적에는 경성제대는 식민지를-권력의 대상으로 포착하는 학문분과를 강좌로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들 식민지학문은 이들 제국대학에 의해서 강좌로 인정되어 제국일본의 관학아카데미즘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경성제대 교수들 중에서 이러한 '조선 중시', '동양 중시'의 경향이 자칫 근대대학의 이상적 지향, 즉 학문의 보편성과 자율성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나미(岩波) 철학총서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학계에서도 저명했던 철학자 아베(安倍能成, 철학·철학사 제1강좌), 하야미(速水滉, 심리학 제1강좌), 미야모토(宮本和吉, 철학·철학사 제2강좌), 미학자 우에노(上野直昭, 미학·미술사 제1강좌) 등이 그러했다.

이들은 서양의 다양한 사상적ㆍ문화적 조류를 예의 주시하면서 개인의 인격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정근식외,『식민권력과 근대지식:경성제국대학연구』,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 15,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p.330>

우현 고유섭은 각기 학문적 지향이 다르고 개성을 가진 교수들로부터 지식을 배우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왕이면 내가 할 공부이니 취미 있는 대로 하고 싶은 공부나 해보자고 한 것이 이 공부"라며 한국미술사 연구를 위한 기반을 착실히 쌓아 나갔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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