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5. 경성제국대학의 두 얼굴배움의 길 - 첫 번째
   
▲ 경성제국대학 예과 건물.


총독부, 제국주의 질서유지 일환

1924년 설립 … 해방후 역사속으로

日 중심 운영 조선인엔 '좁은 문'

조선학생 중심 '반식민' 실천 모색



경성제국대학은 일본이 세운 동경제대를 비롯한 9개의 제국대학 가운데 여섯 번째로 설립된 제국대학이었다.

1924년에 설립하여 1945년에 폐교되었다. 식민지 조선에 당시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인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 배경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1923년 이후 조선인 유지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된 민립대학 운동에 대한 총독부의 대응과정'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이러한 '기존의 통념'은 오류였다고 한다. 지면관계로 그 설명은 줄이기로 한다. 다만 학교 명칭은 본래 '조선제국대학'이 원안이었으나 밀고 당긴 끝에 일본 추밀원에서 '경성제국대학'으로 확정되었다는 사실만은 밝혀두어야겠다.

 

   
▲ 경성제국대학 정문.


▲ 경성제대의 정체성
지금으로부터 68년 전, 1945년 8월15일. 그날 조선 반도 경성의 한 쪽에서 벌어진 일이다.

"경성제대에서는 종전(終戰)의 날, 교수 직원 학생 약 200명이 모여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 그 다음날에 대학 내의 조선인 직원들에 의해 「경성제대자치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에 조선인 학생들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야마가(山家信次) 총장에게 학내경비, 문화재 관리책임의 이관을 요구했고, 학내 교실의 열쇠도 넘기라고 했다. 17일에는 대학정문에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본부의 현관에는 「경성대학」이라고 쓴 종이가 붙여졌다. 그리고 의학부의 현관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帝國' 두 글자에 흰 종이를 붙여 「경성대학」이라고 읽도록 만들었다." <森田芳夫,『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1964, p.402.>

1924년 조선총독부가 설립했던 경성제국대학도 식민통치와 영욕을 같이 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0년도까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일본에서조차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Imperial University)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 받는 존재'였다. 경성대학과 그 후신이라 할 서울대학교는 경성제국대학으로부터의 '단절과 청산'의 대상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 '우리의' 학교가 아닌 '그들의' 학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패전 후 그 반작용으로 지나친 축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 제국이 식민지에 대해 '식민지'라는 표현도 쓰지 못하게 하고 '외지(外地)'라고 강변했는데 전후에는 거꾸로 어떤 것도 '일본적인 것'에서 배제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다.

그런데 일곱 번째로 새운 타이완의 타이베이제국대학(台北帝國大學)은 패전 이후에도 일부 일본인 교직원들이 남아 상당 기간 대학업무와 자료를 인수인계 했다. 또한 타이완 국민정부가 인수하여 운명하면서 국립 타이완대학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와 달리,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직원들은 패전 이후 대학 인계 작업은커녕 일본으로 달아나기 급급했다.

오히려 대학의 중요문서를 불에 태웠다. 추측컨대 '지배'의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뜻에서일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을 망각 속에서 끄집어내어 기억하고 회상했던 것은 그곳에서 연구와 교육에 열정을 바쳤던 교직원들과 모교를 잃은 일본인 졸업생들이었다.

"그들로서는 경성제국대학이 어떤 곳이었는가 하는 질문은 자신들의 존재 증명과도 직결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이란 단어를 꺼내기도 조심스러웠던 한국사회에서는 유진오 등의 '거물급' 졸업자들이 단편적인 수필의 형태로 '젊은 날의 자화상'을 그려내거나, 신문기자의 손을 빌려 기억의 단편들이 추려졌다.

한국일보 기자 이충우가 경성제국대학 출신자들을 취재하여 출간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은 졸업생의 증언을 바탕으로 대학사를 더듬어 간, 당시로선 거의 유일한 단행본이었다.

한국보다 사정이 다소 나았던 일본에서는 옛 교직원들과 졸업생들이 1954년 동창회를 결성하고, 뉴스레터인 『감벽(紺碧)』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이들 중에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고, 대륙문화연구소 등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류학자 이즈미 세이치(泉晴一)는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최초의 학술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는 「구식민지대학고(舊植民地大學考)」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근식 외, 『식민권력과 근대지식:경성제국대학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 경성제대의 이중성
경성제국대학은 '국가에 수요(須要)한 학술의 이론 및 응용을 교수하고 아울러 그 온오(蘊奧)를 궁구함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의 제국대학(帝國大學)을 모델로 설립되었다.

"대학이 한편으로는 교육기관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학술연구기관이라는 것은 우리로서는 명백합니다. 세간에는 최근까지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만 보고 학술연구기관의 사명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의 사명은 학문연구가 첫째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며 이런 점에서 다른 학교와는 분위기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국에서 대학도 국책방향에 따라 노력 분투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상아탑에 틀어박혀 시세에 초연한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본령은 어디까지나 학문연구를 통해 국가적으로 봉공한다, 즉 학문봉공에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速水滉, 「退官」『京城帝國大學學報』161號(1940年 8月 5日)>

경성제국대학은 제국대학이면서 '식민지대학'이었고, 조선에 있었지만 일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으며, 문화학술적인 기관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성격이 뚜렷한 기관이었다.

대학이라는 보편적 제도가 요구하는 요소들 - 예컨대 전문연구분야의 구성, 과학적 훈련과 보편적 방법론의 강조, 연구자의 독자성과 자율성의 중시, 높은 교수들의 지위 등 - 도 발견된다.

동시에 제국대학에 숨겨져 있는 권력적 요소들, 식민지에 대한 철저한 차별의식, 일본 특유의 파벌적 관계 등을 찾아내기도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도 식민지 조선에 위치한 제국대학이면서도 실제 식민지 사회와의 긴밀하고도 육적인 관련성을 가지 않은 채 거의 모든 준거와 법령, 권한이 식민모국인 일본에 의존하는 '비지형(飛地形)'기관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중성은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경성제대는 식민지에 세워지긴 했지만 제국대학이었고, 따라서 제국대학 특유의 제도적 특징이 개별 교수의 학문적 활동에도 크게 반영되었다.

당시 제국대학 이외에도 전문학교와 구제고등학교, 그리고 사립대학의 교원도 '교수'라고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제국대학의 교수는 사회적 지위나 역할, 그리고 제도적 지원의 측면에서 다른 '교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특권적 존재였다. 경성제대도 이러한 교수들의 특권적 조건은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과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총장은 물론이고 교수집단에도 20년간 조선인이 거의 채용되지 않았다는 것, 대학운영과 연구과제의 선정이 철저하게 제국적 질서유지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인적 인프라에서 자연스럽게 결과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경성에 있지만 도쿄를 정신적 원리로 하고 있던 식민지 제국대학이 제국의 해체와 함께 완벽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경성제대와 해방 이후 재구성된 경성대학 간에는 매우 중요한 질적 단절이 존재한다. <정근식 외, 같은 책>

연구조직으로서의 대학은 기본적으로 인적 요소가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일제는 고등교육에 있어서 연구자와 교수 개개인이 갖는 인적 인프라로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대학 내 교수들에게는 상당한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이러한 자치권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의 질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그것을 전제로 한 특권이 제국대학 구성원들에게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근대적 의미에서의 지식인의 자율적 공간으로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문제는 경성제대의 핵심적 인프라라 할 수 있는 대학총장과 교수집단, 연구자들이 총체적으로 식민모국 일본의 제도적, 인적 네트워크에 결합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치요구조차 일본적 특권의식, 차별적 논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 1930년대초 교정에서(오른쪽 네번째가 우현).


▲ 경성제대의 교수들
교수의 관료사회에서의 지위는 대단히 높았다.

당시 일본의 관료체제는 크게 고등문관으로 통칭되는 고등관과 보통문관으로 통칭되는 판임관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 고등관과 판임관에 다시 각각 9개와 4개의 관등, 즉 위계가 부여되어 있었다.

주임관(奏任官)은 관서(官署)의 책임자이다. 본토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이, 식민지에서는 총독이 천황의 재가를 얻어 임명한다(3등~9등). 칙임관(勅任官)은 천왕의 칙령에 의해 임명되는 관리(1등, 2등)이다.

그리고 친임관(親任官)은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관리로서 관료의 위계를 넘어서는 요직이니 내각총리대신과 식민지의 경우 총독, 정무총감이 이에 해당된다. 제국대학 총장은 위계가 1등 칙임관이다. 교수는 1~6등, 조교수 3~7등이고, 예과 교수는 2~7등이다.


▲ 식민지 지식권력체계 연구의 필요성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과 일부 친일파의 자제를 양성하는 식민교육기관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기존의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제발견의 지점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먼저 경성제국대학 연구는 일제의 식민권력과 근대지식이 어떻게 상호결합하고 있었는지를 해명하는 과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실제로 경성제국대학은 따라서 식민통치기간 동안 한편으로는 일본제국 전체 판도를 아우르는 식민지 고등교육체계의 정점(頂點)으로서 식민통치에 순응적인 기능적 지식인을 배출하는 식민지 교육기관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학문(지식)의 권위를 바탕으로 식민통치의 대상으로서 조선을 위시한 '동양(東洋)'에 관한 담론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식민권력의 문화적 헤게모니 형성에 기여하는 '학술권력'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결국 식민권력이 지식과 권력을 통해 어떻게 식민지에 문화적 헤게모니를 확보하려 했던 것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된다.

둘째, 경성제국대학이 식민권력에 의한, 식민권력을 위한, 식민권력의 장치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대학의 존재를 식민지 사회의 한국인들과 전혀 무관한,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로 규정하는 것에는 주의를 요한다.

경성제국대학 외부에서는 1920~1930년대의 '조선학(朝鮮學) 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등 근대지식의 생산 및 분배체계를 독자적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경성제국대학 내부에서는 조선인 학생들,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근대지식의 비판적 수용을 통한 반(反)제국주의, 반(反)식민주의 실천이 모색되기도 했다. 따라서 경성제국대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근대지식의 생산과 분배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식민지배와 저항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셋째, 경성제국대학 연구는 한국대학의 탄생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며, 또 이러한 과정 속에 숨겨져 있는 식민지배의 유산을 조명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경성제국대학은 한국인들의 대학상(大學像)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근대적 학문체계가 한국사회에 수용, 형성, 정착하는 데 중요한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성제국대학 출신자들은 해방 이후 분단체제를 거치면서도 남한과 북한 사회 모두에서 사회적 '엘리트'로서 활동해 왔다.

간추려 말한다면 경성제국대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대학을 어떤 것으로 생각해 왔으며, 실제로 어떤 역할을 담당해 왔는가를 탐색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한국의 대학교육과 학술연구의 배후에 놓인 식민유산이 무엇이며 어떻게 지속되어 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경성제국대학이 어떤 곳인가, 여기서 누가 무엇을 가르치고 연구했으며, 어떤 이들이 학생으로 들어와 무엇을 배웠는가를 보다 엄밀히 분석해야 한다. 앞으로의 연구성과를 기대한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