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으로 가는 통학길은 문학소년의 사색공간
보성으로 가는 통학길은 문학소년의 사색공간
  • 김진국
  • 승인 201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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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년 동안 기차 통학하며 배움에 정진 - 우현의 삶, 세번째
   
▲ 보성고등학교 제3회 졸업사진(1925년 3월). 앞에서 네 번째 줄 왼쪽에서 여덟 번째가 고유섭.


16세 보성고등보통학교 입학

이상 등 '황금기' 인재와 수학


10년간 경인선 타고 학교로 …

차창 밖 '불운한 세상' 보면서

수많은 생각·감회 느꼈을 것



우현 고유섭과 그 세대들은 식민지 질곡이라는 암흑기를 온 몸으로 부딪히며 살았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도 민족의 독립을 갈망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정책은 교육에서마저 마수를 감추지 않았다.

일본어 교육에 중점을 두고 고등교육은 실업에 대한 약간의 기능지식을 가르침으로써 자기들이 부려먹기 편한 식민지 노예를 길러내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을 빼앗고 문화를 말살하여 일본제국에 절대 복종하고 순종하도록 만들겠다는 뜻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 민족사학의 산실 보성고등보통학교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청산 속에 묻힌 옥도/갈아야만 광채 나고/낙낙 장송 큰 나무도/깍아야만 동량 되네

'학도가'란 노래의 한 구절이다. 1905년에 처음 불린 뒤 이 노래는 학문을 권장하는 노래, 항일독립가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유명한 노래여서 후에 여러 가수들에 의해 편곡을 거쳤는데, 20년대에 고운봉, 30년대에는 채규엽이 가사를 고쳐 불렀고, 명국환도 학도가를 불렀다.

퍼진 의도는 좋지만 원곡은 식민지 확장사업의 단초를 보여준 일본 철도를 대표하는 노래였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1920년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청소년 고유섭은 경성에 있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원래 보성학교로 말하면 조선에 신교육이 설립된 지 얼마 아니 되어서부터 설립되어 조선중등교육기관의 원훈이요 여러 가지로 광채 있는 역사를 가진 학교이다.

그 동안 개인 경영에서 천도교로 천도교에서 이번 불교로 경영의 형식은 변함이 있을지라도 교육의 방침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이 오직 청년 자제를 온전 착실하게 지도 교육하였을 뿐이다." <동아일보 1924년 4월4일자>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고 명명한 분은 고종(高宗) 황제였다. 보성(普成)은 흔히 '널리 이룩한다'는 뜻으로 쓰지만 고종이 하사하신 이름에는 '널리 사람다움〔人間性〕을 열어 이루게 한다'는 보다 깊은 뜻이 들어 있다고 한다.

대한제국에서 요직을 두루 지내고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용익(李容翊, 1854∼1907) 선생은 절박한 국내외의 정세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면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뜻을 굳혔으니, 이것이 곧 보성의 건학이념인 '흥학교 이부국가(興學校以扶國家; 학교를 세워 나라를 버틴다)'의 정신인 것이다.

민족의 역량을 배육하고자 자비로 보성소학(普成小學)과 중학 그리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장차 국가의 동량이 될 인재를 키워내기에 힘썼다.

그리고 편집소 보성관(普成館), 인쇄소 보성사(普成社)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것도 이 보성사에서였다.


 

   
▲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시절, 1922년 10월8일 경주 불국사 수학여행 중 다보탑에서 찍은 기념사진(앞 줄 앉은 사람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

▲ 피압박 민족의 희망성전
감성이 풍부하고 영민한 젊은이 고유섭은 배움의 길에서 그리고 문학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 꿈을 꾸어보려 했다. 민족 사학으로 당시 이름이 높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조선미술사 공부에 대한 소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평생의 친구 가운데 하나인 이강국을 비롯한 친구들을 만나며 고보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때 보성학교는 전동(박동), 지금 중동학교 건너편에 몇 백 년 된 느티나무 한 개가 남아 있는 1000평 남짓한 자리에 회색빛 목조 2층 건물로 학교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역사가 길고 최린, 정대현 같은 위대한 분들이 교장으로 역임하고 많은 선생님들이 거의가 국사급(國師級)에 속하여 피압박 민족으로서 한 가닥 희망을 걸은 성전(聖殿)이었다.

특히 우리 보성학교는 학생 한 사람을 뽑아도 성적으로 뽑았고, 일호의 사정(私情)이 없었으나 반면에 성적만 좋은 학생이 있으면 서슴없이 보결로 받아들여 혹은 공립학교 등에서 불온 학생으로 출학을 당했거나, 혹은 불운한 세상에 정규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젊은이들을 많이 구제하였으니… "<홍봉진(19호),「나의 보성 시절」『보성』제6호, 1970, 42-60쪽/『보성백년사』, p. 234~5>

또한 우현이 보성학교를 다니던 이 시기는 보성학교로서는<보성백년사(普成百年史)>에 따르면, '황금기'라는 표현에 가장 걸맞는 기수가 16~18회라 할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인재가 배출되었지만 문화예술분야만 살피더라도 후에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문인들이 가장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

동기로는 조중곤(趙重滾, 1908~?)과 구인회 발기인 이종명과 김유영(16회) 등이 있고, 4년 수료생으로는 문학평론가 임화(16회)와 이헌구(16회)가 있다. 한 해 후배로는 이상(李箱, 17회), 김환태(18회), 김기림(18회) 등이 있다.


-보성고보의 교사들
강장(强將) 아래 약졸(弱卒)이 없다는 말이 있다. 보성이 명문사학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역시 교장 선생으로부터 평교사에 이르기까지 덕망과 학식을 갖춘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노백린·최린·정대현 등 비롯한 교장, 그리고 주시경·김인식·고희동·황희동·김일 등 한국인 선생 그리고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고마츠사키 긴지로(小松崎金次郞)은 영원한 스승으로 칭송받을 만큼 보성을 사랑하고 아꼈다. 당시의 교사들은 일본의 고등사범학교 출신이 많았다.

-수학여행
요즈음은 학생들의 수학여행이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1920년대에는 종종 중등학교 수학여행이 일간신문에 소개되곤 하였다. 1920년 5월21일자 동아일보는 보성고등보통학교생이 경주 고적을 찾아 서울역에서 부산행 기차로 떠나 24일 귀경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또 학생의 기행문이 5회에 걸쳐 연재되기도 했다.


수학여행이 자리를 잡은 1922년부터는 일정한 수행여행지를 정하는 등 보다 체계적인 수학여행이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1학년생은 개성, 2학년생은 부여, 3학년생은 경주, 4학년생은 금강산, 5학년생은 만주의 봉천(현재의 심양)을 수학여행지로 정하게 되었다.


그 무렵 수송동의 보성고보 교사는 학교의 역할과 기능을 넘어서 문화공간이자, 요람이기도 했다. 학교 시설이 종종 미술행사를 위해 활용되었다. 서울에 미술 전시장이 없던 시절이어서 학교 강당이 요긴하게 쓰였던 것이다.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도 전시회가 가끔 열렸으나 특히 보성고보는 시내의 중심가에 있어 문화공간으로서 활용도가 매우 높았다.


 

   
▲ 1923년 10월11일 금강산 수학여행 중 유점사에서.

▲ 차창 밖으로 펼쳐진 세상
보성고보 시절 5년, 그리고 경성제대 5년을 합치면 무릇 10년이 넘은 기간을 경인선을 이용했다. 적지 않은 시간이다.

독서삼매에만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다. 일제 강점기, 차장 밖으로 비치는 식민통치 아래의 우리 삶의 변화상을 지켜보면 수많은 생각과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문학 소년이기도 했던 고유섭은 1936년에 한 수필에서 중학교에 들어가 서울로 통학하던 때를 회상하여 적고 있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16·7년 전 중학(中學)에 처음 입학되는 해 차(車)속에서 매일같이 읽던 톨스토이의 <은둔(隱遁)>이란 소설의 기억이다. 그때 어느 상급학교에 다니던 연장(年長)이던 통학생은 내가 조그만 일개 중학 일년생으로 이런 문학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매우 건방져 보였던지――또는 부랑스러이 보였던지는 모르나 그것을 읽어 아느냐는 물음을 받던 생각이 지금도 난다.
-<「靜寂한 神의 世界-三昧境」『朝光』, 1936년 10월호/ 《우현 고유섭 전집》9권, 『隨想 紀行 日記 詩』>

당시 인천의 기차통학생들은 친목도모와 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워 1919년 「한용단」을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경 우현은 「한용단」의 문예부에서 진보적인 문인이었던 고일, 정노풍, 진종혁, 조진만(1903~1979) 등과 함께 인천에서 문학운동을 하였다.

고유섭은 1925년에 『동아일보』에 「경인팔경(京仁八景)」이란 연시조를 실었다. 그 소제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효창원(孝昌園) 춘경(春景)/ 2.한강(漢江) 추경(秋景)/3. 오류원두(梧柳原頭) 추경(秋景)/
4. 소사도원(素砂桃園) 춘경(春景)/5. 부평(富平) 하경(夏景)/6. 염전(鹽田) 추경(秋景)/7. 북망(北邙) 춘경(春景)/8. 차중(車中) 동경(冬景)

팔경의 나열 순서가 공교롭게도 서울 효창원부터 시작하여 한강, 오류, 소사, 부평, 주안 등의 순서라 서울에서 인천으로 기차 타고 오면서 만나는 지명이란 점이 흥미롭다.

더구나 제 8경에 <차중 동경(車中冬景)>이 있어 차장을 통해 본 풍경을 노래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계절도 봄에서 시작하여 겨울로 끝맺고 있음도 우연은 아닌 듯싶다.

앞바다 검어들고 곁 산(山)은 희어진다/만뢰가 적요(寂寥)컨만 수레 소리 요란하다/이 중에 차중정화(車中情話)를 알려 적어 하노라

특히 <차중 동경>은 "자연의 풍경이라기보다는 근대 문명의 이기인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인천 학생들의 내면 풍경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도 있다.

경인선은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놓인 철도이다. 1899년 9월18일에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에는 노량진―제물포를 오갔고, 한강교를 놓게 되면서 서울역에까지 이어지게 된 것은 1900년 7월8일이다.

당시 서울과 인천의 철도 길이는 (21마일, 약31㎞)이었는데, 개통 당시의 열차 운행은 인천과 노량진에서 오전 오후 각 1회 다녔고, 소요시간 1시간40분이 걸렸다고 한다. 우현이 통학하던 1920년대 무렵에는 한 시간 안팎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당시 경성에 도착하면 고유섭은 전차(電車)를 이용해서 수송동에 있는 학교에 갔을 것이다. 하루 승차 인원은 1920년은 6만명, 1925년에는 9만명이 조금 넘었다는 통계가 있다. 참고로 1925년도 경성부의 인구는 약 30만명이었다.

공부하는 소년들아 /너의 직분 잊지 말고/새벽 달은 넘어가고/동천 하늘 빛이 나네 <학도가 4절>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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