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을 만나다
   
▲ 1930년대 개성부립박물관 집무실에서

 


1905년 인천 용동서 출생

3·1운동 당시 동네아이들에

태극기 그려주며 함께 만세


시대를 앞서 간 한국미술사학의 선구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첫 발자국을 남긴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사가. 우현 고유섭을 가리키는 수식어는 심원하고 거대하기만 하다.

한일합방이 되던 1905년 태어나 1944년 광복이 되기 전까지 불행한 시대를 살았지만, 그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한국미술의 가치를 발견하고 의미부여를 하며 '한국미술사'란 학문의 분야를 완성했다. 그는 오직 '한국미술사'란 학문의 세계에 온 영혼을 바쳤다. 그의 삶을 회고한다.

 

   
▲ 경성제대 시절 벗들과 함께(앞줄 오른쪽 끝)


▲ 문학청년 고유섭
고유섭은 1905년 2월2일(음력 12월 28일) 인천시 용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주연과 어머니 평강 채씨 사이에서 1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고유섭은 1914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인천의 선각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최초의 공립학교였다. 당시 고유섭의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으로 유복한 편이었다. 어린 유섭은 공부를 잘하는 명석한 학생이었으나 고학년이 되면서 점차 반항적 성격으로 변해갔다.

고유섭은 3·1운동 당시 초등학생이면서도 동네아이들에게 태극기를 그려주고 만세를 부르며 용동 일대를 돌다가 붙잡혀 3일 간의 구류를 당한 적도 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강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뒤인 1922년(18세) 그의 집안은 현 애관극장 뒤 능인포교당 자리에 큰 집을 지어 이사한다. 그러나 서모와 갈등을 겪으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학생지>와 같은 책에 글을 발표하거나 이따금 훌쩍 어디론가 혼자 떠나기를 즐겨하며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많은 스케치와 유화작품은 그의 뛰어난 그림실력을 알 수 있게 만든다.

경인선을 타며 통학한 보성고등보통학교 시절 고유섭은 우등생이었으며 1925년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에 응시, 졸업생 12명 가운에 이강국과 둘 만이 합격한다.

고유섭은 스스로 가정적으로 불행하다고 말할 정도로 어두운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은 시나 수필로 발현됐다. 중학시절부터 문학활동을 해온 고유섭은 대학에 들어가 더욱 적극적인 문학활동을 펼친다. 그는 야외에서 토론을 하며 즐겼던 '오명회'와 문학에 뜻을 둔 예과생들로 결성된 문우회에 가입해 활동한다.

오명회는 민족정신을 찾자는 취지로 문화2회 동기생 이강국, 한기준, 성락서, 이병남, 그리고 고유섭 등 5인이 만든 모임이다. 여름엔 천렵을 즐겼으며 겨울엔 스케이트를 타며 토론하는 등 주로 야외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가 활동한 모임중 '문우회'는 경성제국대학의 조선 학생들간 친목도모를 위해 결성된 조직이었다.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보충한다'는 <논어>의 귀절에서 이름을 딴 문우회는 창작시, 수필을 위주로 소설, 희곡 등을 모아 1년에 한 차례 동인지 <文友>에 발표햇다.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한 이 잡지는 5호 40편의 글로 중단됐으나 회원 가운데 유진오, 최재서, 이효석, 조용만 등 후대 우리 나라 문단을 이끈 사람들이 활동했던 문학의 광장이었다.

이 무렵 고유섭은 여러 편의 시와 수필을 발표한다. 이 당시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적 정서는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 작품은 정서적 표현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반면, 사물인식에는 객관성과 명중성을 보이고 있다. 맑고 순수한 심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요약하면 고유섭은 가정적인 불우함을 문학으로 해소하려 했으며 그런 열망은 시에 고독이라는 심정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경성제대 시절 '文友' 참여

유진오·이효석 등과 활동

점차 학문적 관심으로 전환

미학전공 우리美 탐구 매진

 

 

   
▲ 경성제국대학시절 미학연구실의 우현(왼쪽 끝) 모습. 오른쪽 맨 끝은 스승인 우에노 나오테루 교수.


▲ 미학 미술사 전공
고유섭이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부터 쏟아부은 문학에 대한 열정은 점차 학문적인 관심으로 전환된다. 당시 일본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선회하는 정책의 하나로 1923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다.

이를 위해 1922년부터 동경제국대학 출신자들을 유럽의 유명한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고, 이들은 경성제대에 부임하며 교수자료와 도서들을 갖고 왔다. 특히 법문학부의 철학과 교수들은 일본서도 이름 있는 철학자들이었다.

고유섭은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B부 제2회 입학생으로 2년 과정을 마친 뒤 유명한 교수들이 집중돼 있는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게 된다. 예과 2회 동기생인 이희승 박사가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왜 하필 취직하기 어려운 미학을 전공하려고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우현은 "우리의 미(美)를 연구하고 싶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미학강좌가 설치된 때는 1927년이다. 이는 동경제국대학에 미학강좌가 개설된 이후 30여 년 뒤의 일이다.

고유섭의 미학, 특히 예술학에 영향을 준 스승 우에노는 동경제대에서 여명기의 서양미학에 경험적 심리주의에 기반을 둔 오오츠카에게서 미학을 배우고 난 뒤 1924년~1927년 베를린대학에 유학한 학자다.

따라서 우에노는 당대 유럽에서 성행하고 있는 미학을 공부해 스스로 정신과학의 입장에서 비교미학적인 방법, 즉 비교예술학의 방법론을 미술사에 도입하려는 학품을 세웠고 이것은 고유섭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한국미술사에 대한 입지를 세우고 예술철학에 관한 논문을 쓰고 졸업한 고유섭은 당시 준재로 평을 받은 와다나베가 간부후보생으로 군대에 입대함에 따라 1930년 4월 법문학부 미학 및 미술사연구실의 조수로 임명된다.

이 때는 경성제대 졸업 직후로 우현의 자신의 일기에 "조수 1년 안에 서양미술사를 하나 쓰고 2년 안에 경주불국사연구 및 불교미술사를 연구하자"고 쓰고 있다. 고유섭은 학부시절부터 계획했던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기 위해 조수생활 3년간 더욱 구체적인 자료를 수집한다. 그 하나는 전국의 탑을 조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문헌에서 미술사자료를 추출해내는 작업이었다. 이런 작업은 개성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계속된다.



개성부립박물관장 부임후

고대미술사 연구 토대구축

1944년 40세 일기로 요절


 

   
▲ 강감찬비가 보이는 개성부립박물관.


▲ 개성부립박물관 시절
우현은 1934년 4월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한다. 그 때까지 개성박물관장은 오랫동안 공석인 채로 있었다. 개성지역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까다로운 지방으로 당시 총독부 산하 모든 기관의 장은 일본인들이 맡았으나 개성 지방만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문에 부윤을 비롯한 모든 기관장 즉 개성전기회사, 조선식산은행 지점 등은 개성인이 주축이 돼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성상인들은 일체 거래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개성박물관장 역시 조선인이 임명돼야 한다는 개성부의 요망으로 우현이 임명된 것이다.

개성으로 생활터전을 바꾼 고유섭은 조수시절부터 착실히 다져온 미술사에 대한 학문을 구체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개성지역을 비롯한 많은 지역을 탐방 답사하면서 우리 고대미술의 진상을 규명하고 토대를 구축하는 업적을 남기게 된 것도 이 때였다.

또 조수시기에 착수한 석탑연구 외 우리나라 회화사의 문헌수집, 고려도자의 연구 등 점차 연구범위를 넓혀갔으며 폭넓은 시야도 갖게 됐다. 1936년부터는 당시 이화여전 문과과장이었던 이희승의 권고로 일주일에 한번씩 이화여자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의 미술사 강의를 나갔으며, 기차를 타고 경성에 와서 강의를 하고 다시 저녁 기차에 내려오고는 했다.

이 시기엔 또 우리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고유섭을 찾는 젊은 학도들이 있었는데 그는 이들과 더불어 전국을 조사하기도 했다. 이 때 조사한 개성의 유적, 유물을 1935년 이후 개성의 민간자본으로 발간되는 주간지 <고려시보>에 소개하기도 한다.

1940년 초는 일본이 우리 민족에 대한 최후의 횡포로 황국신민화의 명분으로 한국사연구활동과 한국사 교육 금지, 한국어 출판·언론의 금지 등의 민족말살책을 획책한 시기다.

고유섭은 이 때부터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건강이 악화됐고 이에 따라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됐다. 이 시기 이후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고 논문도 발표하지 않게 된다.
 

   
▲ 1929년 부인 이점옥 여사와의 결혼식 사진.

청년시절부터 문학청년의 자질을 가졌던 우현은 일찍부터 소설을 쓰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후세에 남을 것은 가장 예술적인 작품뿐이다. 음악은 당대뿐이요, 미술은 일잔일전에 그친다. 가장 널리 남을 수 있는 것은 문학이다. 평생 뜻을 두고 있는 공민왕의 취재, 차차 40이 되어가니 51기로 그 구상을 그려보기 시작할까?"라는 일기 내용으로 미뤄 우현은 공민왕의 이야기를 소재로 평생 역작을 남기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러나 조선미술사에 대한 개설서와 함께 공민왕 소재의 소설을 필생의 과제로 남긴 채 간경화증으로 1944년 6월26일 수철동 묘지에 잠든다. 그의 나이 40세 였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