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첫 미술사학자
인천 자부심…지역愛 자극
'탁월한 학문세계' 기리려
본보, 오늘부터 기획연재
   
▲ 인천이 낳은 선각자 우현 고유섭 선생은 어두운 시기, 혁혁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15일 인천시립박물관 광장에 있는 우현동상을 찾은 한 모녀가 동상 옆에 서서 우현의 동상을 바라보며 선생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우현을 제대로 보는 일은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 비견할 수 있다."

지난 5월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전집(10권) 완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기웅 열화당 대표가 한 말이다.

그럴 만큼 고유섭(1905~1944)이 이룬 학문적 성과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얘기로 들린다.

우현은 인천 태생이다.

경기도 인천군 다소면 선창리 용현(현 인천시 중구 용동 117번지 동인천길병원터)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눈부시게 활약했다.

마흔살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가 남긴 많은 글은 후학들에게 거듭 읽히고 있다.

천재적이면서도 소박했던 우현의 삶을 짚어보고자 본보는 오늘부터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고유섭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다.

조선미술사에서부터 조선 금속학 초고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에 혼을 불어넣었다.

그런 우현의 정신은 인문학이 홀대를 받는 오늘의 세태를 돌아보게 한다.

우현은 당시 경성제대에서 조선인 처음으로 혼자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그후 1933년 4월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그때 조선 사람이, 그도 만 서른이 안 된 이가 부립박물관 관장을 맡는다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 정도로 우현은 이미 독보적인 학문 세계를 이룩했던 셈이다.

신생 학문의 주춧돌을 놓고 사람을 키우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개성 3걸'로 불리며 박물관학파를 이룬 황수영(1918~2012), 진홍섭(1918~2011), 최순우(1916~84)가 그의 1대 제자다.

그가 남긴 200여 편의 글 가운데 오늘날 아주 널리 읽히는 게 있다.

"…한국 고미술은 누천년간 가난과 싸우며 온 끈기 있는 생활의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이다. 그것이 '고상한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면, '장부의 일생'을 어찌 헛되이 그곳에 바치겠는가…" <고유섭 전집 제9권 수상 기행 일기 시 중에서>

새얼문화재단은 앞서 1992년 인천이 낳은 미술사학자 고유섭을 '제1회 새얼문화상' 수상자로 정해 기리며, 인천시립박물관 앞마당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문학)는 동상 건립문에서 "…우현 동상 제막은 우리 인천사(史)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이정표이고, 인천의 명예와 자존심의 표상이다…"고 적었다.

호(又玄)와 이름(裕燮)처럼 신비롭고도 불꽃과 같이 살다 간 한국 미술사의 '큰 별'. 본보 연재를 통해 우현을 다시 만나는 일은 후학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다.

/이문일기자 ymoon58@i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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