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는 이 사실을 즉시 법적 후견인인 정동준 계장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오경택 씨가 저녁초대를 한 날 정동준 계장과 함께 오경택 씨 집을 방문했다.

 그 날 인구는 오경택 씨로부터 오기문 학생의 둘째 누나인 오기영을 소개받았다.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오기영은 곽인구라는 귀순용사가 아버지가 그토록 가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고향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고향에서 온 먼 친척을 만난 듯이 무턱대고 친밀감을 보이면서 어머니와 함께 인구를 극진히 대접했다. 아버지의 고향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그 말이 그녀에게는 예사롭게 들리지 안았던 것이다.

 인구는 이날 밤 오경택 씨 가족들로부터 융숭한 저녁 대접을 받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남쪽에서는 이렇게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자기만이 간직하고 있던 마음속의 불안감을 떨치며 남쪽 사회에 대해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가졌다. 그는 사실 육군회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치자 마자 서울시민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의 불안감은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산으로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게 된다는, 말하자면 그가 북쪽에서 정치군관들로부터 세뇌교육을 받으면서부터 간직하게 된 뿌리깊은 죽음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다.

 이런 가족간의 교류가 인연이 되어 인구는 그 다음날부터 방과후 오기문 학생으로부터 영어 개인과외를 받으며 대학입학예비고사를 준비해 오다 그 다음해 봄에 한양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신원특이자로 특례 입학했다. 오기문 학생은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그 뒤 두 사람은 이따금씩 한번씩 만나 가족들의 안부나 전해주면서 술이나 한 잔씩 나눠 마실 뿐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어쩌다 전철역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반가울 뿐 다니는 대학도 다르고 전공하는 학과도 달랐기 때문에 학생신분이었던 그들 두 사람에게는 그 이상 어떤 변화 있는 생활이 없었던 것이다.

 인구는 대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계속 방배동 정동준 계장 집에서 동거하면서 그들의 가족들과 한 식구처럼 생활했다. 1985년 여름, 영등포 대방동에 있는 귀순자숙소에서 방배동으로 넘어왔으니까 만 4년 넘게 정동준 계장의 가족들과 함께 산 것이다.

 정동준 계장은 그 긴 시간을 인구와 함께 생활하면서 인구로부터 많은 이질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하던 몸이라서 여름방학이 되면 으레 여행배낭을 꾸려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비해 인구는 여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라서 그런지 그런 면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동준 계장의 그늘에서 벗어나면 금방 죽는 것처럼 불안에 떨고 있었고, 방학이 되어 시간이 남아돌아도 여행 한번 떠나는 법이 없었다. 종일 정동준 계장의 어린 자식들과 어울려 놀며 집안에서만 뭉그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