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윤효중 음악인
학창 시절 빵 사먹을 돈 모아 레코드판 수집
왕년 최고 DJ … 인간미 넘치는 신포동 마당발
   
 

이 남자, '센치'해도 '너~무' 센치하다. 사이먼 앤 가펑클, 조지 베이커 셀렉션과 같은 '올디스 벗 구디스' 음악CD를 품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길 좋아하는 사람.

신포동의 음유시인 윤효중(63)씨는 이 시대 마지막 '아날로그 로맨티스트'다.

"음악은 제 삶의 동반자입니다. 젊은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음악 없는 제 삶은 무의미합니다."

윤 씨에게 음악은 '유 민 에브리 씽 투미(너는 나의 모든 것)'다.

인천 음악감상실 'DJ 1호'인 윤 씨는 그의 고백처럼 평생 음악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살아왔다.

기쁠 때나 외로울 때, 몸과 마음이 아플 때도 음악은 늘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음악은 그에게 치유이자 어머니 품과 같은 따뜻한 안식처였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신포동을 떠난 적이 없어요. 신포동은 제 음악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국전쟁 뒤 신포동엔 예닐곱개의 미군클럽이 있었다. 인천에 미군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포동에선 언제나 팝송이 흘러나왔고, 어린 효중은 귀를 달콤하게 해 주는 팝송에 점점 빠져 들었다.

신흥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인천중, 제물포고 재학 당시에도 그는 팝송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는 LP판을 수집하기 시작했지요. 당시엔 라이센스판이 귀해서 빽판(복제판)을 주로 사 모았어요. 친구들이 용돈으로 빵 사 먹을 동안 저는 레코드판을 모은 겁니다."

그렇게 모은 판이 현재 2000여장 정도에 이른다. 이 판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의 곁에서 고단한 마음을 위로해 준다. 이따금 몇 곡을 선곡, CD로 구워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그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하던 그는 마침내 고3이던 1967년, 동인천역 앞 '별음악감상실' DJ 생활을 시작한다.

별음악감상실은 지금의 대한서림자리 5층짜리 건물 맨 꼭대기층에 있었다.

그렇게 군에 입대하던 1971년까지 윤 씨는 '수도권 최고의 DJ'로 주가를 올렸다.

송창식, 윤형주 등 세시봉 멤버들과 가수 김정호 이동원, DJ 김광한 씨와 같은 음악인들과 '절친' 사이인 이유도 DJ전성기 당시 교류를 통해서였다.

제물포고 12회 졸업생인 그는 인하대 국문과 최원식 교수와 둘도 없는 친구지간인 것을 비롯해 인천의 마당발이기도 하다.

"형님 어디 가세요?" "아주머니 건강은 괜찮으세요?" "어이쿠, 밥 한번 먹자~."

그와 함께 신포동을 걷다보면 마주치는 사람 가운데 3명 중 2명 꼴로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

신포동에 다니는 사람들의 70%가 그의 아는 사람이란 얘기다.

인생을 흐르는 음악처럼 살아가는 그가 요즘 음악에 대해선 혹평을 던진다.

"요즘 음악은 감각만 있고 깊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좀 가벼운거 같지 않으세요? 하긴 뭐 세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인간이 개체유지를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듯 음악은 영혼의 음식"이라는 그의 말이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귓전을 맴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