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2012]고대부터 이어진 문명의 충돌'희생'위로 쌓아올린'희망'
[실크로드 2012]고대부터 이어진 문명의 충돌'희생'위로 쌓아올린'희망'
  • 남창섭
  • 승인 2012.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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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유럽·터키문화 대립으로'갈등
3개 종교 교대로 국가통치 참여'평화'유지
   
▲ 사라예보 시내에는 여전히 90년대 내전당시 폭격당한 건물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


9 보스니아 사라예보/모스타르

실크로드의 역사는 바로 길의 역사다. 세계 4대 문명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고 이들은 길을 통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새로운 길은 곧 작은 물물교환에서부터 경제교류로, 문화교류로, 결국 문명의 교류로 이어졌다. 발칸반도는 바로 이런 문명의 교류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길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의 길이며, 로마 제국의 확장의 길이면서,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의 길이기도 하다. 동서 문명의 교착지이기에 고대로부터 잦은 전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로 인해 고대문명의 흔적들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지금까지 가장 두드러지게 남아있는 모습은 바로 오스만투르크의 흔적들이다.

그들은 500년 가까이 이곳을 지배하면서 많은 흔적들을 남겼다. 제국의 흔적이면서 문명의 흔적이며 실크로드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리스와 로마, 유럽과 터키의 종교와 문명이 혼재된 발칸반도의 예루살렘. 그곳이 바로 사라예보다.

지난 여름 어느 일요일 찾은 사라예보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간간히 보슬비가 내리면서 을씨년스러울 정도다.

여러 종교와 민족이 혼합되면서 혼돈의 시기를 보낸 사라예보의 옛 모습이 여전히 도시를 감싸고 있다.
사라예보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지배하던 시기인 16세기. 황금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문명의 중심도시였다.
1800년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인구가 3만명,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인구 1만4000명에 비해 사라예보의 인구는 8만 명을 넘었다.

유럽과 발칸에서 이동하는 모든 물건은 사라예보를 거쳐 터키로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발칸반도, 특히 보스니아는 다리로 유명하다.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은 곳이기도 하지만 이 다리는 원래 오스만제국이 발칸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거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경제와 종교, 문명을 확산시키기 위한 식민지의 다리이며, 실크로드의 다리이기도 하다.
 

   
▲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된 장소. 지금은 라틴다리 옆에 시립박물관이 들어서 후대에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사라예보 최고의 쇼핑가인 페르하디야 거리를 지나면 오스만제국 시대 만들어진 아케이드 전통시장 베지스탄을 만날 수 있다.

오스만제국 지배시절 이곳은 수많은 물건들이 넘쳐나는 경제교류의 중심지였다.

베지스탄은 109m에 이르는 석조건물로, 1543년 가지 후스렙-베이 왕의 명령으로 만들어졌다. 건물 안 양쪽으로 52개의 점포가 있는데, 주로 직물을 팔고 있다. 베지스탄 밖은 장인들의 거리로 바로 연결된다.

이곳은 터키로부터 유래된 금속공예 기술을 이용한 방짜 제품이 지금도 제작되고 있다. 주전자, 향로, 금제·은제 그릇 등 다양하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모리카 여관도 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여관은 16세기 전반에 카라반을 위한 숙소로 만들어졌으며, 40개의 방에 3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건물에는 방외에 공동의 거실, 상품 창고, 마구간 등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이곳의 이슬람 사원은 16세기 지어진 것으로 발칸반도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건물이다. 사원 바로 뒤에는 현대식 건물이 위치해 있는데 역시 16세기에 건립된 곳이다. 무슬림 고등학교로 지금도 학교로 이용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발칸 지배 방식은 이후 근대 서구문명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한때 성직자와 상인, 그리고 이어서 군대를 보냈던 방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 베지스탄 전통시장 거리에는 예전 오스만투르크 시대의 여관과 상가의 모습이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사라예보 시내를 걷다보면 여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이슬람 사원의 아잔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한집 건너 하나 꼴로 세르비아 정교회와 가톨릭 성당, 유대인 교회, 이슬람 사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제 2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이유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민족과 종교를 두고 극한의 갈등을 빚어 왔다.

기원전 알렉산더와 로마제국의 전진기지들이 발칸 반도 곳곳에 위치해 있다. 비잔틴 제국까지 유럽세력이 강했지만 15세기 아시아에서 넘어온 오스만투르크제국과 충돌한다. 500년 가까운 오스만의 지배를 지나 19세기에는 또 다시 유럽세력과 대립한다.

문명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유럽호텔 주변이다.

호텔 앞에는 로마시대 이곳을 지배했던 유적이 지금도 발굴중이며 바로 옆에는 베지스탄으로 불리는 오스만제국 지배를 보여주는 아케이드 시장이 위치해 있다. 유럽호텔은 19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오스트리아 지배로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문명의 충돌은 현대로 넘어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사라예보의 가장 유명한 다리인 라틴다리.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된 곳이다.
 

   
▲ 유고 내전 당시 파괴됐다가 재건돼 평화의 상징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스타리모스트'돌다리.


1914년 6월1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청년에 의해 암살된 장소로 지금은 시립박물관으로 변신해 전쟁의 위험성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티토에 의해 유고연방국가로 묶여 한동안 평화를 누리기도 했지만 90년대 연방국가가 붕괴되면서 또 다시 내전으로 내몰린다.

보스니아에서 발생한 수만 명의 학살은 전 세계인의 공분을 일으켰고 유엔과 유럽연합의 군사적 개입으로 유고연방은 붕괴되고 보스니아도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있고 이를 끄기 위한 국민들의 노력도 남다르다.

대통령조차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무슬림과 가톨릭, 정교회가 8개월씩 돌아가며 통치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마련했다.

무슬림이 40%가 넘지만 시민들의 복장에는 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슬람 국가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다.
국립학교의 경우 한반에 가톨릭, 정교회, 무슬림 한반에서 공부하는 경우도 많다.
현재 중동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 간 종교와 문명의 극한 충돌을 발칸반도, 특히 보스니아에서는 이미 해결한 것이다. 엄청난 희생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종교와 문명을 강요하지 않는 시스템을 정착시킨 것이다.

베지스탄 거리에서 화실을 운영하고 있는 보스니아 유명 화가 이브라힘(IBRAHIM HRLE)씨의 바람도 사라예보 시민과 다르지 않다.

절망과 파괴, 죽음의 어두운 그림들로 가득한 화실 한편에 단연 눈에 띄는 작은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빨강색과 초록색, 연두색과 분홍색으로 가득한 그림 속에는 이슬람 사원과 정교회·가톨릭 성당이 한데 어우러지고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화 속 사라예보가 숨 쉬고 있었다. 오늘날 사라예보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모스타르' 내전 상처 곳곳에
"잊지말자 그 아픔 … "

보스니아 남서쪽 제2의 도시 모스타르는 1990년대 내전의 상처가 가장 크게 남은 곳이다. 도시 입구부터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가득한 거대한 묘지가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시내 중심가 새로 지은 이슬람 사원 같은 건물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북한 김정일의 손자 김한솔이 유학하고 있는 학교도 보인다.

모스타르는 헤르체코비나 왕국의 수도였다. 지금 보스니아의 공식 국명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길게 불리게 된 이유다.

발칸의 암울한 내전과 학살의 역사는 모스타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91년 유고연방에서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한 이후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가 새롭게 독립 공화국을 선포한다. 유고연방의 핵심인 세르비아의 반격이 시작되고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되는 보스니아 사태가 발생한다.

이곳 모스타르에도 무슬림인 보스니아인과 가톨릭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 정교회의 세르비아인이 옹기종기 형제같이 몰려 살았지만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된다.

처음에는 세르비아인이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계 시민들을 학살하고,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손을 잡고 세르비아를 몰아낸다.

주변 강대국과 유엔의 개입으로 진정기미를 보이던 내전은 1993년 다시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가 서로를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의 극한의 내전양상을 대표하는 곳이 바로 '스타리모스트' 돌다리이다. 오스만 제국이 건설한 이 돌다리는 결국 1993년 12월 크로아티아계의 포격으로 파괴되고 만다. 내전의 상처는 참혹했다. 도시 외곽에는 수만 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거대한 묘지가 생겨났다. 도시 곳곳에는 여전히 당시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내전이 끝난 1995년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돌다리를 재건하는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2004년 7월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터키 등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완공식이 열리고 이 다리는 세계역사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이 다리는 단순한 돌다리가 아니라 보스니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하나의 상징물과 같다.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입구에 적어둔 글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DON'T FORGET(잊지 말자)" 당시의 참상을 잊지 않기 위한 모스타르 시민들의 염원인 것이다.

▲ 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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