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600년 천년을 내다본다
   
▲ 의왕시 청계동에 있는 하우현 성당은 19세기 초 천주교의 피난처로 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이다. 1906년에 신축한 사제관은 몸체는 석조, 지붕은 골기와를 얹은 팔각지붕 형태의 한국과 프랑스의 절충 건축형식이다. /사진제공=의왕시


3. 종교의 성지, 경기도(4)


천주교, 종교 아닌 학문으로 처음 들어와

중화중심 세계관 파괴하며 구질서와 갈등

박해 희생 된 순교자들 곳곳에 성지 남겨


"한국교회사에서 대체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밖으로부터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세우는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한국의 종교사상, 이경원>

천주교와 조선의 만남은 처음에는 종교가 아니라 학문이었다.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 수도 북경을 오가며 이미 16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문물의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선교사를 만났다. 그 때 학문과 함께 서학이라는 종교도 접한 것이다.
 

   
▲ 은이성지.


서학, 즉 학문과 종교는 조선의 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지구는 둥글었고,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설)이 부정되고, 중국중심의 세계관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양반도 천민도 신 앞에서는 평등했다.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는 권철신·정약전·이벽 등 경기 지역 실학자였다. 이들은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 '주어사',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 등의 사찰에서 서학 연구모임을 갖는다. 바로 이곳이 한국천주교가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린 성지다.

초기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과정에서 남인계 학자들은 연구에서 출발해 신앙으로까지 발전시켰다.

특히 광암 이벽은 한국 초기 교회사 기원과 관련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다.
 

   
▲ 어농성지 순교체험장.


최초 영세자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도록 권유했으며, 정약용의 친구로서 많은 학문적 조언을 남겼다. 이벽·권철신·권일순·이승훈·정약종 등 이들 5명이 초기 한국천주교 창설 주역이다.

하지만 유교적 가치관이 팽배해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서학의 수용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했다.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이른바 4대 박해 때 수많은 유·무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광주 천진암성지와 안성 미리내성지, 수원북수동성당, 화성 남양성모성지, 이천 어농성지, 양평의 양근성지, 용인의 은이성지, 안양 수리산 성지, 안성 죽산성지 등 도내 곳곳은 박해시기에 신앙을 증거한 수많은 순교자를 낳은 땅이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건너온 선교사들이 사목활동을 펼치던 무대다.

또 한강 양화나루터의 절두산성지는 병인박해 때 1만여 신자들이 처형당했다. 그래서 시인은 "한강아, 너는 물이 아니라 피로 흐른다"고 했다. 이처럼 경기도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학문이며, 종교인 서학, 즉 천주교가 자리하고 꽃피운 성지다.

양주 장흥에는 명주에 깨알같은 작은 붓글씨로 조선교회의 박해 상황을 적어나간 '백서(帛書)'의 집필자이자 신유박해 순교자인 황사영(黃嗣永)의 묘와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南鐘三) 성인의 무덤이 있다.

또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들인 약현, 약전, 약종 형제들의 생가 터인 남양주 마재에는 순교자 정약종이 묻혀 있다.
 

   
▲ 천진암 입구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미리내성지에는 김대건 신부 등 초기 천주교를 전파했던 성인들의 묘지가 모여 있다.
안양 수리산 성지에는 최경환(프린치스코, 1805~1839) 성인이 기해박해로 옥사 순교한 후 묻힌 곳이다. 우리나라 두번째 신부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신부가 그의 장남이다.

화성시 남양동 남양성모성지는 병인박해 때 많은 무명 교인들이 순교한 거룩한 땅이다. 그러나 충청도 내포사람 김 필립보, 박 마리아 부부와 용인 덧옥골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김홍서 토마 등 4명만 기록에 남아있다.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의 천주교어농성지는 한국교회 최초의 성직자 야고보 주문모 신부 등 17명의 순교자를 기리고 있다.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에 있는 북수동성당은 1890년 왕림성담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북수동성당은 2000년 이 일대를 순교성지로 선포했는데, 구한말 천주교 박해 때 수원화성 인근 북수동 성당 일대에서 순교자들의 형이 집행됐기 때문이다.

양평군 오빈리에 있는 양평 양근성지는 천주교회의 근본이며 요람이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인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고향이다. 특히 양근성지에서부터 충청도, 전라도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됐다.

용인 남곡리 은이성지는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살던 교우촌이다. 1822년 충청남도 당진 출생인 김대건과 가족들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1827년 은이성지와 골배마실에서 생활했다. 골배마실은 김대건이 사제가 되어 돌아와 최초로 사목을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으로 알려져 있다.

안성시 일죽면 죽림리 죽산성지의 죽산은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로 나뉘는 주요 길목으로 병인박해 때 교인들이 참혹한 고문을 받다가 처형당했다.

한국교회의 발상지 천진암성지는 다산 정약용이 '천진암 단풍은 상을 주어야 할 최고의 풍경'이라고 격찬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이벽과 권일신, 정약종, 권철신, 이승훈 등 당대의 학자 5명이 이곳에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다.

이곳에서 6~7년 간 강학을 열며 신앙의 차원에 머물던 천주교를 학문으로 승화시키고, 대중에게 전파했다. 현재 이곳에는 한국 천주교회창립선조인 이들 5명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이처럼 도내 곳곳에는 박해와 배교(背敎)의 강요를 뿌리치고 신앙을 지키며 순교의 길을 걸었던 선조들의 혼과 넋이 깃들어 있다.

/글 이동화·사진 김철빈기자 itimes21@itimes.co.kr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 5인

정약종 "땅 보며 죽느니 하늘 보며 죽으리"


▲이벽-서학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켜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은 천진암과 주어사 등에서 학업과 수업에 전념, 서학을 종교적 신앙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천주교를 연구해 마침내 신앙공동체를 조직했다. '성교요지(聖敎要旨)',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를 지어 모여드는 문하생들이 천주학을 천주교 신앙으로 승화하도록 이끌었다.

이승훈과 이벽, 정약용, 권철신 등이 서울 명례방(지금 명동) 이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갖다가 1785년(정조 9년) 의금부(추조)에 적발된다(추조적발사건). 이후 찾아온 시련과 집안의 강력한 배교 요구 등의 영향으로 32살에 죽음을 맞는다.


▲권일신-정조가 아끼고 존경한 대학자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1)은 양근(지금의 양평)에서 권암의 다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 철신과 함께 당대에 명망 높은 대학자로서 정조 임금까지도 그를 존경하고 아꼈다고 한다.

이벽의 설교를 듣고 천주교에 입교한 그는 내포(현재 충남 아산만 일대)의 이존창, 호남의 유항검을 입교시켜 충청도와 호남지역 전교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1791년 진산사건(양반 윤지충이 어머니상 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 의식으로 상을 차린 것이 발단이 되어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하고, 윤지충과 권상연 등을 사형에 처함)으로 고문 끝에 죽음을 맞이한다.


▲권철신-정통 유학자에서 신심 깊은 신자로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은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그는 제자들과 함께 양근과 여주 일대에서 유학자들의 집단학습인 강학(講學)을 주관했으며, 동생 권일신의 뒤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했다.

정조가 1800년 승하하자 정순왕후와 기회를 만난 노론 벽파들이 신유박해를 일으켜 남인 학파를 전부 소탕하기로 작정했다. 권철신도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과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중 옥사했다.


▲이승훈-최초 영세자, 초기 천주교회 개척
이승훈(베드로, 1756~1801)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성호 이익의 문하에 속한 남인 시파(時派)의 선비였다.
북경 천주교회와 연락을 도모하던 이벽의 요청을 받은 그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1783년 북경 연행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서양과학과 천주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의 영세를 받는다. 귀국 후 1784년 서울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주고 이후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가졌다. 최초의 집단세례식을 거행하는 등 국내에서 선교사 없이 한국인에 의해 자생적으로 조선 천주교회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약종-이해 쉬운 한글 교리서 저술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은 광주 마재(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 정약전과 정약용의 형제다.

그는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상·하편을 썼다. 이 책은 주문모 신부의 승인을 받아 신자들에게 보급됐다. 신유박해로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을 때 "땅을 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칼을 받아 순교했다고 한다.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신앙 선조 : 수원교구 지역 순교자, 수원교회사연구소, 하상출판사>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