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600년 천년을 내다본다
   
▲ 경기도는 곳곳이 기도처고, 성지의 땅이다. 도내에 있는 사찰은 조선시대에도 왕실 원찰로 그 법맥을 이어왔다. 지난 5월 부처님 오신날 한 사찰을 찾은 불자가 기도를 올리고 있다. /김철빈기자 narodo@itimes.co.kr


3.종교의 성지, 경기도 (2)


중생구재 일생 바친 원효대사 경기도서 진리 깨우쳐

수도사·삼막사·신륵사·자재암 등 관련 전설 전해져

정조, 용주사 원찰 삼아 아버지 사도세자 명복 빌어


▲원효, 경기도에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다
경기도는 정신이 깨어난 땅이다. 신라 고승 원효(元曉,617~686)가 해골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은 곳이 경기도다.

평택 수도사와 안양 삼막사, 여주 신륵사, 남양주 묘적암, 동두천 자재암 등에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는 불교사상가이자 학자이며 사회지도자로서 △모든 것이 돌아가는 근원이 일심(一心)이라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다르게 보이지만 실제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난다는 '화쟁사상(和諍思想)' △'일체의 걸림이 없이(無碍)'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을 바탕으로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 등 많은 저술을 남기며 대중 교화에 힘썼다.

즉 그는 붓다의 기본 강령인 '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밑으로는 중생을 교화한다(상구보리 하화중생, 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최대한 실현한 것이다.<한국의 종교문화, 김성철>

걸림없이 행동하는 원효는 무애자재(無碍自在)해 일시에 몸을 백 곳에 나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그의 업적과 위대성은 탄생설화와 무덤속 대오설화, 요석공주 설화, 척반구중설화 등을 남겼다.

△무덤속 대오설화의 당항성=원효는 삼국통일 무렵, 경북 경산군 자인면에서 태어나 10살 때 출가했다. 그는 선진 불교문화를 배우기 위해 34살 때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당의 현장(602~664)에게 유식학(唯識學)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으나 첩자로 몰려 갇혀 있다가 겨우 돌아왔다.

이어 45살 때 두번째로 역시 의상과 함께 서해 바닷길을 이용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지금은 경기도 땅인 당시 백제 당항성에 도착했을 때 날이 어두워 땅막(土龕, 토감)에서 잠을 잤다. 잠결에 원효는 몹시 갈증을 느껴 바가지에 고인 감로수같은 달콤한 물을 마셨다.

이튿날 아침, 그는 땅막은 오래된 무덤이었고, 간밤에 마신 바가지 물은 해골안에 고여 썩은 빗물이라는 것을 알고 뱃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원효는 문득 깨달았다.
 

   
▲ 의왕 청계사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龕墳不二"

이에 원효는 더 이상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곧바로 되돌아 와서 경주의 분황사 등에서 경전을 편찬하는 등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간 인간 구도의 길을 걸었다.<원효의 생애와 사상, 은정희. 원효대사 순례길 사업계획, 문화체육관광부>

윤여빈 실학박물관 학예팀장은 "경기도는 원효대사가 득도하는 정신적인 출생지이자, 신라의 삼국통일 후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자 했던 그의 숨결이 배어있는 회향처(廻向處)다"며 "한국불교가 세계불교의 주변부에서 중심지로 전환하는 역사적인 증거"라고 했다.

△요석공주와 인연=원효는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나에게 주지 않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 誰許沒柯斧 爲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위작지천주"라고 노래를 부르며 신라의 서울(경주)을 돌아다녔다. 태종 무열왕은 누가 귀부인을 원효와 맺어주면 국가에 큰일을 할 사람을 낳겠다는 의미라고 간파하고 딸 요석공주를 맺어줘 신라 십현(十賢) 중의 한 사람인 설총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이후 그는 파계승이라는 자책감으로 스스로를 '아랫 것 중의 아랫 것'이라는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고, 광대 복장에 표주박을 두드리며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노래,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부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성속(聖俗)의 경계를 초월한 무애행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나녀(裸女) 유혹을 뿌리친,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동두천 소요산 자재암은 여인으로 변신한 관세음보살이 원효를 시험하기 위해 나타났으나,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절을 짓고 자재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비가 거센 어느날 원효의 토막으로 비에 젖은 여인이 찾아온다. 선뜻 들어오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 남양주 수종사


이 여인을 목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인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에 색심이 일지 않으면 자신의 공부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인과 자신의 경계를 느낀 스님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너는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호호호, 스님도 어디 제가 스님을 유혹합니까? 스님이 저를 색안으로 보시면서"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스님의 귓전을 때렸다. 서서히 정신을 차린 스님은 처음으로 빛을 발견한 듯 모든 것을 명료하게 보았다.'

이곳 자재암 주변에는 원효가 수행하는 동안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과 함께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원효는 686년 신라 제31대 신문왕 6년에 혈사(穴寺)라는 조그만 절에서 일흔이라는 불꽃같은 일생을 마감하고 입적했다.

이에 아들 설총이 그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조성해 분황사에 봉안했다.



▲경기도의 불교 문화유산, 원찰
경기도에는 많은 불교문화유산이 있다. 왕실불교와 호국불교가 결합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화성의 용주사와 여주의 신륵사, 양주의 회암사 등은 왕실 원찰(願刹)이었다. 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남한산성과 도성을 지키던 북한산성은 불교의 공력(功力)으로 이루어졌다.

원찰은 망자의 명복과 왕실의 발복을 기원하고자 왕족들이 건립한 사찰을 말한다. 대표적인 원찰로 신라시대 문무왕의 감은사가 있으며, 조선 세조 때에는 왕실의 안녕을 위해 경기도의 사방에 원찰을 지정했다. 동쪽 불암사, 서쪽 진관사, 북쪽 승가사, 남쪽 삼막사가 그곳이다.

△의왕 청계사(淸溪寺)=조선시대 연산군이 도성에 있는 절을 폐쇄했을 때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의 본산으로 정했던 유서깊은 절이다.

또 올해로 열반 100주년을 맞은 한국불교의 중흥조 경허선사(1849~1912)가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9살 때 출가한 곳이다.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없는 소가 되어야지(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 고삐를 맬 콧구멍이 없는 소처럼 자기 주장이 뚜렷한 수행자)'라는 말을 듣고 대오각성했다는 그는 한국불교, 특히 선불교의 법통을 전승한 '한국의 달마대사' '제2의 원효대사'로 칭송되고 있다.

그의 수제자 혜월(慧月, 1861~1937년), 수월(水月, 1855~1928년)ㆍ만공(滿空, 1871~1946년) 등이 법맥을 이었다.

청계사는 정조가 화성 용주사 이전에 사도세자의 원찰로 삼고 밤나루 3000그루를 심었다는 호법사찰이다.
△남양주 수종사(水鐘寺)='감청색의 산빛이 높이 솟은 곳, 누각이 이 산속에 붙여 있다네, 문을 열면 강물이 들어오고요'(수종사에 묵으며, 정약용)

남한강과 북한강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운길산 중턱의 깊은 산속, 전망좋은 그윽한 산사가 있다. 다산 정약용이 어린시절 부터 자주 찾았던 남양주 수종사다. 서거정과 초의선사, 정약용, 송인, 이이, 김집 등이 두물머리가 내려다보이는 풍광을 시로 노래했다.

'떨어지는 물이 종소리를 낸다'해서 세조가 '수종사(水鐘寺)'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우리나라 5대 명산인 운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남양주 진접 봉선사(奉先寺, '선왕을 받든다'는 뜻)는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의 무덤 광릉(光陵)을 지키는 원찰이다.

남편 세조가 죽자 왕비 정희왕후가 중창하고 아들 예종이 친필 현판을 하사한 전국 교종의 대표 사찰이다. 1900년대 주지를 지낸 운허(이학수, 1892~1980, 항일투사)의 나라사랑이 배어 있고 춘원 이광수가 피신했던 곳이기도 하다.

△화성 용주사(龍珠寺)=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화성 용주사(龍珠寺)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창건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찰이자, 효행사찰이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어떻게 왕이 사찰을 창건할 수 있었을까? 이는 성리학이 일상생활 규범과 통치이념으로 작용한 반면 불교는 신앙의 대상, 즉 종교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고 해서 절 이름을 용주사라고 했다고 한다.

△여주 신륵사(神勒寺)=여강 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여주 신륵사(神勒寺)는 역사가 숨쉬고 문화향기가 가득한 영릉(英陵, 세종릉)의 원찰이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봉미산 자락의 천년고찰과 여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이곳에서 입적한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1320~1376)와 함께 노닐었던 고려말 문신 이색(1328~1396)은 '먼산은 긴 강이요, 성긴 소나무는 푸른 돌 곁이로세'라는 시를 남기는 등 많은 문사들이 찾아왔고 그들은 뮤즈(muse)가 됐다.

△안성 칠장사(七長寺)=요즘 뜨고 있는 영화 '광해'에서 나이 많은 아들 광해군의 어머니로 나오는 인목대비, 그녀가 왕위계승의 희생양이 된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원찰로 삼었던 사찰이 안성 죽산 칠장사(七長寺)다.

혜소국사라는 승려가 일곱도적을 감화시켜 수도승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산이름도 칠현산(七賢山)이다. 또 어사 박문수가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다가 칠장사에서 하루를 묵으며 꿈속에서 보았던 과거시험문제 8개 중 7개가 나와서 장원급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천 연주암(戀主庵)=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암절벽 정상에 자리잡은 과천 연주암(戀主庵)은 조선 태종의 두 아들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둘째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어버지 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즉 세종(世宗)에게 왕위를 물러주려고 하자 유랑길에 나섰다.

두 대군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을 하며 욍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현재의 위치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사람들이 두 대군의 심정을 기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각각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글 이동화· 사진 김철빈기자 itimes2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