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셰스쿠 정권 초기'자주적 외교노선'택해 호황
김일성식 통치체제 전환에 경제파탄·민생도탄 초래
시민심판 받아 처형 … 기존간부 실권 장악'반쪽혁명'
   
▲ 1989년 12월, 루마니아의 유명한 독재자 차우셰스쿠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일어난 광장의 모습. 광장 가운데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25m 높이의 삼각형 조형물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데,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혁명 기념비다.


4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인류의 역사는 교류의 역사다. 동서남북으로 이어진 무수한 길은 바로 인류 교류의 흔적이다. 인류는 길을 만들어 물건을 팔고 사는 교역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간의 문화도 교류되었다. 열등한 문화는 우수한 문화를 수입한다. 우수한 문화는 항상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확장하는 데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화는 국경을 넘어 전파된다. 인류는 언제나 보다 자유롭고, 보다 윤택한 삶을 지향해왔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는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순탄한 발전은 없었다. 인류의 사고와 행동은 이율배반적이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남을 굴복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시대를 역행하는 문화를 수입하고 그 문화로 인해 무너진다. 소통하고 상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교류에 있어 통치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의 선택이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망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도 한 통치자의 무모한 역행으로 인한 슬픈 현대사를 가지고 있다.

발탄 유럽의 남동부에 위치한 루마니아는 그들의 국명 이름인 로므니아(Romenia)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 제국의 후손'임을 자랑한다. 수도인 부쿠레슈티는 고고학적으로는 오래된 도시이지만 최초의 기록은 루마니아 공국의 체패수왕 때인 15세기 중반부터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 부쿠레슈티는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 독재통치의 슬픔을 딛고 활기를 찾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시내의 전경.


탐사단은 먼저 부쿠레슈티의 역사적 장소인 혁명광장을 찾았다. 이곳은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루마니아는 19세기 후반까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8년에야 소련의 영향으로 인민공화국이 되었다. 당시의 통치자인 데지 서기장은 스탈린주의에 입각하여 빠른 속도로 각종 시설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추진한다.

10년 후, 소련군이 철수하고 독자노선을 추진하던 루마니아는 1965년 차우셰스쿠의 집권과 함께 민족주의가 강한 자주적 외교노선을 선택한다. 국명의 발음을 로므니아로 바꾼 것도 이때다.
 

   
▲ 루마니아의 유명한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세운 피플 하우스. 이 건물은 단일건물로는 미국 국방부 펜타곤 건물에 이어 두번째로 크다.


차우셰스쿠 정권의 초기는 5개년 경제개발의 추진, 다양한 민족문제의 포용, 교육의 개방과 창작의 자유, 소규모이지만 개인사업의 허용 등을 통해 국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외교도 빛났다. 바르샤바 조약군의 군사훈련에 참가하지 않음으로써 서방국가들의 호응을 얻어낸 것이다. 특히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이 체코를 침공하자, "유럽평화에 대한 치명적인 실수", "세계 사회주의 혁명역사에 있어서 치욕적인 순간"이라며 비난했다.

이러한 외교노선은 윌슨 영국총리, 드골 프랑스대통령, 닉슨 미국대통령을 루마니아로 불러들였고, 무역관세일반협정(GATT), 국제통화기금 및 세계은행에 가입하며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앞장섰다. 차우셰스쿠의 지도력이 국민적인 인기를 넘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자 자신의 통치가 곧 루마니아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러한 생각은 1971년 동맹국인 북한을 방문한 뒤 더욱 확고해진다. 김일성의 영웅 숭배적 통치체제에 감명을 받은 그는 '7월테제'를 통해 강력한 국가통제정책을 실시한다. 이와 함께 개인우상화와 가족정치를 시행한다. 자신을 '위대한 루마니아의 왕자', '카르파티아의 천재'로 미화하고, 자신의 생일을 국가 최고의 경축일로 선포한다. 일당독재를 찬양하는 공산당은 '인민의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 현대 루마니아의 건설자, 탁월한 당과 국가의 지도자, 영명한 공산주의 사상가'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북한의 김일성 통치사상체계가 그대로 도입된 것이다.

그로부터 모든 것은 그의 입에서 결정됐다. 경제는 파탄 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그래도 그의 입은 언제나 법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국민들은 차우셰스쿠의 퇴진운동에 나서고 시위대에 대한 무혈진압은 결국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혁명광장은 당시 공화국 광장이었다. 차우셰스쿠는 이곳의 왕궁 발코니에서 5분 만에 연설을 중단했다. 그의 연설에 동조하라고 동원한 노동자들이 모두 그의 퇴진을 외쳤기 때문이다. 광장을 에워싼 건물 여기저기에는 그날의 무자비한 살육을 기억하라는 듯 지금도 탄환자국이 선명하다. 차우셰스쿠 부부를 총살시킨 시민혁명은 성공했는가. 아니다. 최고통치자만 사라졌을 뿐 공산당 간부들이 여전히 실권을 장악했다. 차우셰스쿠 없는 공산당에 맞설 수 있는 대안세력도, 시민사회도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혁명을 가로챈 공산주의'가 또다시 득세한 것이다.
 

   
▲ 혁명광장 안에서 기나긴 역사를 품고 서 있는 동상.


인간은 낮은 위치에 있을 때 겸손하고 성실하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기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하여 사리분별을 잃는다.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앉았으니 겁날 것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리는 언제나 한 뼘 머리 위에서 교만한 위세로 인간을 조정한다. 인간이 자리를 만들었지만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 그것이 자리다. 하지만 인간은 오늘도 자리 때문에 싸운다. 자리가 벌이는 놀이에 노예가 되어 있음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국가와 민족의 천년대계 주춧돌을 쌓아올리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중노동인가. 그래서 통치자는 오래살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장수한다. 성과주의와 인기몰이로 국민을 속이며, 밤마다 드라큘라가 되어 국민들의 피를 빨아먹는다. 국민은 하늘이다. 하늘은 평상시 선량하지만 아니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뒤집는다. 통치자는 선량한 국민일 때 더욱 분골쇄신해야 한다. 선량한 국민을 화나게 만드는 통치자는 결국 자신의 피로 대가를 치러야 함을 혁명광장은 알려주고 있다. 국가의 통치자는 항상 국민에게 자신의 목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통치자의 첫번째 덕목이자 부국으로 가는 길이다.

 

   
▲ 드라큘라의 성으로 유명한 브란성의 모습


■ 대표적 관광명소 '브란성' '800년 역사' 낭만품은공포의 '드라큘라 성'

브라쇼브 남서쪽 32㎞ 지점에는 '드라큘라의 성'으로 유명한 브란성이 있다. 이 성은 1212년 독일기사단이 만든 후, 16세기에는 오스만투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브란성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다양한 양식이 추가되었는데 1920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여왕에게 헌정되었고, 이후 대대적인 개조를 통해 낭만적인 여름 궁전이 되었다.

브란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지면서부터다. 15세기 이 성에 머물렀던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체페슈는 적과 범죄자를 가혹하게 다뤄 악명을 떨쳤는데, 이는 1897년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의 가상모델이 되었다.

이후 브램 스토커의 소설은 영화, 드라마에까지 등장하면서 유명세를 떨쳤고, 루마니아인들의 영웅이었던 체패슈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드라큘라와 동일시되었다.

브란성도 덩달아 드라큘라가 살았던 성으로 알려지며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인기가 높다.

▲ 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