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맛자락' 휘날리며 위대한 역사 주인공 '우뚝'
'치맛자락' 휘날리며 위대한 역사 주인공 '우뚝'
  • 이동화
  • 승인 201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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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600년 천년을 내다본다
   
▲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있는 나혜석 거리는 수원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 여성화가 정월 나혜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300m가량의 보행자 전용 문화거리다. 이곳에는 조그만 물감통과 캔퍼스를 들고 있는 나혜석상과 그의 그림과 시가 있다. /사진제공=수원시




2 600년의 역사 '문화원형'을 찾아서-역사

1.경기여성 이야기 ①



왜적 총칼 물리친 '행주대첩 여인들' 환란속 기품 잃지 않아

천재적 재능 뽐낸 '신사임당'·최고 대중스타 '바우덕이'

봉건인습 맞서며 예술혼 불태운 '나혜석'


경기여성의 특징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 하고, 궁극적인 경기도 여성상은 무엇일까?
경기도는 삼국의 각축장이어서 변화가 많았다. 이후 고려와 조선의 흥망과 일제의 수탈, 대한민국의 건국과 전쟁, 근대화의 성쇠가 반복됐다. 이러저런 전쟁과 질곡의 역사속에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이 여성이었다.

자신은 물론 자식을 지키고 가정을 꾸려야 했던 경기여성은 강인하고 실리적이며, 지혜롭고, 변화에 앞장섰다. 또 서양의 종교가 들어온 곳이 경기도로 이를 먼저 받아들이고 지킨 사람들이 경기여성이어서 신앙심이 강하다. 특히 경기여성들은 자녀사랑이 남다르고 가정을 지키고자하는 염원이 강했다.

때문에 경기도는 여성의 땅이고, 경기여성은 경중미인(鏡中美人)의 특징처럼 단정하고 깔끔하다. 윤여빈 실학박물관 학예팀장은 "경기도 사람은 소나무와 같다. 융·건릉의 소나무처럼 군집을 이루면서도 고풍스럽고 개체 속성이 강한데, 경기여성 역시 고통과 환란속에서도 그 기풍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경기도에는 여성 역사인물이 많다. 자신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거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고양, 행주대첩의 여인들
벌써, 400년 전이다. 우리는 1593년 행주산성에서 일본군과 맞서서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펼칠 때, 필요한 돌을 행주치마에 담아 날랐다. 역사는 우리를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함성과 존재는 입에서 입으로 역사의 기록보다 더 또렷하고 날카롭게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군인의 의복과 깃발, 장막 등을 만들거나 밥 짓기, 빨래하기, 방아찧기, 키질하기, 물 길어오기 등을 했지. 우리 말고도 고양 지역의 '노적봉과 밥할머니' 민담에 나오는 '밥할머니'는 임진왜란 때 여인부대를 모아 전투한 실제 인물도 있다. 이 부대는 행주산성의 승병을 돕기위해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고 북과 꽹과리, 징 등을 울려 왜군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하더군.

역사는 왜 우리의 이런 활약상을 기록하지 않고 정절을 훼손당한 이야기나 절개를 지키고 순절한 이야기에만 관심을 갖는가?


■ 행주대첩은 조선 시대, 1593년(선조 26)에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친 싸움. 임진왜란 때의 3대 전첩(戰捷)의 하나이다.


▲안성, 대중문화의 효시 바우덕이
나는 조선시대 10대 아이돌 스타야. 내가 일약 스타 덤에 오른 것은 경복궁 중건 위문공연 덕분이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하면서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을 위문하기 위해 놀이패를 불렀는데 우리 '안성 남사당패'도 참가했던거야. 이날 공연은 대박이었어. 물론 나의 빼어난 미모와 가무실력, 특히 신기에 가까운 줄타기가 한몫했지.

풍물(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음)·덜미(꼭두각시놀음) 등 6가지 프로그램을 가지고 소리와 재담, 묘기로 일꾼들의 혼을 '쏘~옥' 빼 놓았던거야. 덕분에 보잘 것 없는 천민 집단인 일개 놀이패에 불과한 우리는 당상관 정3품의 벼슬까지 얻었어. 그것이 우리 남사당패 영기(令旗)에 걸어준 옥관자(玉貫子, 옥으로 만든 망건 관자)야.

이후 우리는 관중을 몰고다니는 흥행 보증수표였지. '남사당패'라는 팀이 아니라 '바우덕이'라는 스타에 더 열광했어. 물론 나는 50명의 팀원 가운데 홍일점이었구.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효시로, 요즘 뜨고 있는 한류의 씨앗을 뿌렸다고나 할까.

우리는 스타 시스템에 의해 탄생한 스타가 아니야. 경기도 출신 빅스타인 박지성과 차범근, 조용필과 이미자, 김연아와 장한나, 하지원보다도 훨씬 유명했어.

우리는 기예를 전업으로 하는 보잘 것 없는 천민 유랑유희집단이야. 안성 청룡사 불당골에서 안무와 소리 연습을 했고 팀원 50명 가운데 리더를 꼭두쇠라고 하지.

■ 바우덕이는 1848년 안성에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암덕이다. 뛰어난 기량과 인기에 힘입어 15세에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됐다.


▲파주, 5만원권 주인 신사임당
나는 경기도 사람이야. 내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강릉이지만 시가인 경기도 파주로 시집와서 500년 넘게 파주 율곡리에 살고 있어.

요즈음 5만원권 신권 화폐 도안 인물이 되면서 나의 주가가 많이 뛴 것같아.

나는 초충도(草蟲圖)나 포도 등 산수화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 그리고 태교를 잘한 여성인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이 내가 지향한 여성상이야. 나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기보다는 독립된 인간으로 살고 싶었지.

시·글씨·그림에 일가견을 이룬 조선의 대표 여류 예술가인 내가 부덕(婦德)의 상징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조선 유학을 보수화로 이끈 송시열이 내 그림을 찬탄하면서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 이이를 낳았을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부터야. 송시열은 내아들 율곡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의 제자야.
아들 율곡이 대학자, 정치가로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나를 천재화가라고 평가하기보다는 율곡의 어머니,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상징하는 인물로 칭송하더군.
화가 신씨(申氏)에서 부덕(婦德)의 신부인(申夫人), 모성(母性)의 담지자로 이렇게 거듭된 나의 변신은 지식과 권력을 통해 생산되는 담론의 효과인 것이지. 그러니 나의 변신은 무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부탁이 있다면, 5만원권의 주인공인 나를 구기거나 훼손하지도 숨기지도 말고 좀더 깨끗하게 다뤄주길 바래. 그리고 어려운 이웃도 많아 도와 주세요.

■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본관은 평산(平山).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와 당대 제일의 서화가인 이우(李瑀), 여류 화가인 매창(梅窓) 이부인(李夫人)의 어머니이다.


▲용인, 사주당 이씨의 태교신기
태교는 아내와 남편을 비롯해 온 집안식구가 함께 해야 해.
조선의 여인에게 육아는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어. 나는 이를 문제삼아 태교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한 '태교신기'를 지어 사회의 고정관념에 맞섰어. 부부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 것이지.

태교신기는 내가 네 자녀를 양육하면서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일종의 육아일기이야. 조선시대에 쓴 세계 최초의 태교 전문서라고 평가하더군. 이 책은 용인 모현면 매산리,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저술했어. 벌써 200여년이 훌쩍 지났지만 요즘 엄마들에게도 일독 정도는 권하고 싶어.

이 책은 10장 35절의 태교 이론과 서·발문, 묘지명 등으로 구성됐는데, 태모의 심성과 태아의 환경, 태교의 이치·효험·중요성, 태교의 구체적인 방법 등을 설명했고 부성태교의 중요성도 강조했어.
내가 태교를 강조한 이유는 하늘로부터 받은 천품은 동일하지만 어머니 뱃속에 있는 동안 인간의 품성이 결정되기 때문이지. 다음 내용은 태교신기의 1장 1절과 2절에 있어.

"사람의 성품은 하늘에 근본하고, 기질은 부모로부터 이루어진다." "스승의 십년 가르침이 어머니가 열달 길러줌만 못하고, 어머니가 열달 길러 줌은 아버지가 하루 낳아 줌만 못하다."

내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여성 실학의 대표주자인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에서부터인 것 같아. 여기에 태교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있는데, 이는 나의 '태교신기'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고 나의 어머니는 빙허각이씨의 외숙모야.

■ 태교신기(胎敎新記)는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 1739∼ 1821)가 1800년(정조 24)에 아기를 가진 여자들을 위해 한문으로 글을 짓고, 아들인 유희(柳僖)가 음의(音義)와 언해를 붙여 1801년(순조 1)에 만든 책.


▲수원, 시대를 앞서 간 나혜석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의 길을 갈 것이고, 내가 선택한 삶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최근 고향 수원에 내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기고, 동상도 세워지고 전시회와 기념사업을 펴는 등 나를 재평가하고 있어 수원시민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다만, 나혜석거리가 음주가무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나와 경기청년들이 함께 호흡하며 문화예술이 꽃피는 거리였으면 합니다.

나를 보수적인 사회의 벽을 온몸으로 부딪혔던 진취적인 여성이라고 하는 평가에는 동의합니다.
실제로 나는 시대 이데로기로서의 현모양처 교육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속셈이 숨어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놓고 남녀를 차별하는 그런 세상 법칙에 줄기차게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이같은 봉건적 인습에는 소신발언과 실천하는 행동으로 맞섰지만 이혼과 정신장애 등 잇단 비극까지는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결국 나의 삶은 사건의 연속인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습니다. 일본유학, 애인의 요절, 독립운동과 옥고, 변호사와의 연애와 결혼, 만주생활, 세계일주 여행, 파리에서의 염문과 이혼, 이혼고백서, 위자료 소송, 행려병자, 쓸쓸한 죽음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나에 대한 평가는 프랑스 파리의 스캔들과 이혼을 지나치게 부각하던데, 언제부턴가 고향에서 재평가하고 있어 그나마 위안입니다.

■ 나혜석(羅蕙錫, 1896~1947)은 수원군 신풍리(현재 수원시 신풍동)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이다, 또 문필가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여권운동의 선구자다. 진명여고 졸업 후 동경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서울에서 첫 유화 개인전을 여는 등 인기작가로 활동했다.


/글 이동화·사진 김철빈기자 itimes21@i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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