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간호장이 피를 다 뽑고 침대를 내려오자 간호원은 간호장이 누웠던 자리에 대신 누우면서 불퉁거렸다.

 『피 뽑는 것이 지겨워서 저 이제 병원생활 그만 하여야 되갔시요.』

 『나도 애순 동무처럼 늘 그런 말을 중얼거렸지만 아직도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어. 공화국 간호원들은 수혈실이 비어 있어 때를 대비해 복무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입바른 소리는 그만해. 그것이 차라리 마음 편할 거니까….』

 간호장은 피를 뽑고 나니까 온몸이 젖은 솜처럼 가라앉는다면서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해대다 자기 대신 침대에 누운 간호원의 혈관에다 채혈 주사바늘을 꽂았다. 젊고 건강해서 그런지, 간호원의 팔뚝에서는 연방 붉은 피가 쑥쑥 솟아올랐다. 간호장은 잠시 간호원의 팔뚝을 내려다보며 채혈량을 조정해 놓은 뒤, 인영의 팔뚝 혈관을 타고 몸 속으로 수혈되고 있는 수혈량도 다시 조정했다. 인영은 그때서야 식은땀을 흘려대며 이따금씩 미간을 찌푸려 댔다.

 『간호장 동지! 이 행려환자, 이자 정신이 드는가 봐요. 이따금씩 아프다고 이마를 찡그려 대요.』

 간호원은 인영의 침대 옆에 누워 자신의 피를 수혈 받고 있는 환자를 지켜보다 간호장이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깨어날 시간도 됐다.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행려환자지만 잘해줘라. 누구한테 모둠매(집단구타)를 맞았는지는 모르갔지만 자기 자식이 저렇게 사경을 헤맬 만큼 두들겨 맞았다는 걸 알면 그 집 오마니 가슴이 얼마나 미어지겠는가….』

 간호장은 동료 간호원의 피가 인영의 몸 속으로 순조롭게 수혈되자 허리를 툭툭 두들기면서 간호원실로 걸어갔다….

 이 무렵, 정남숙은 지역 당 세포 비서 겸 사회안전부 아파트단지 제4반 인민반장을 겸직하고 있는 고영순 비서의 아파트에서 생활총화를 하고 있었다. 현관(거실)에는 사회안전부 아파트단지 9개 인민반 250여 가구 중 당원 30명 단위로 한 사람씩 뽑아놓은 12명의 당 세포들이 모여 있었다. 매주 금요일 밤마다 자아비판(自我批判)과 호상비판(互相批判)을 하면서 인민반 소속 당 세포들의 한 주일간 생활을 점검하고 토론하는 생활총화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현관에 앉아 있는 12명의 당 세포들은 모두들 지쳐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퇴근하자마자 집에다 밥곽(도시락)이나 내려놓고 바로 달려온 사람들이라 한시바삐 생활총화가 끝나기를 학수 고대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생활총화는 아직도 호상비판을 남겨놓고 있는 중이라 언제 끝날지 귀가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세포들은 비서가 먼저 일어나 『지금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해 주신 생활총화를 시작하겠습네다』 하고 생활총화 개회를 선언하자 빙 둘러앉은 순서대로 자리에서 한 사람씩 일어나 자신의 한 주일간의 생활을 비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