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가는 길목 …'그리운 삶'은 계속된다
통일로 가는 길목 …'그리운 삶'은 계속된다
  • 이동화
  • 승인 201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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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600년, 천년을 내다본다




 

   
▲ 도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의 비무장 지대 마을인 기정동 마을 풍경. 마을 한 가운데 보이는 것이 165m 높이의 북한 국기 게양대다. /사진제공=파주시




▲DMZ와 민통선

내년이면 한국전쟁이 포성을 멈춘지 60주년이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한반도를 휩쓸고 간 '폭풍(북한의 남한 공격 개시 암호)'의 상흔은 깊고 넓고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고 죽는 큰 싸움, 전쟁은 이 땅에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와 민간인 출입통제선(CCL, Civilian Control Line)을 남겼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에 따라 남한과 북한이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2㎞씩 물러나 비무장 지대를 만든 것이다. 155마일의 휴전선이 그어진 셈이다.

이듬해 2월 미군은 군사작전 등을 목적으로 남방한계선 바깥으로 5~20㎞의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민간인의 귀농을 규제하는 귀농선을 설정, 출입을 통제했다. 이 선이 바로 민간인 통제구역선, 즉 민통선(民統線)이다. 1958년 한국군이 휴전선 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출입영농과 입주영농을 허가하면서 귀농선이 민통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DMZ는 파주시 장단면 강정리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에서 시작해서 동으로 248㎞를 뻗어나가 강원도 고성군 동해안에서 끝을 맺는다.

오늘날 DMZ는 전쟁과 분단의 상징이며, 남북통일의 길목으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60년간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산림이 울창하고 수많은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가 됐다. '지구의 마지막 갈라파고스'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비무장지대 양쪽에는 남북 쌍방의 군사력이 집중 배치되어 있다.

 

   
▲ 파주시 군내면에 있는 제3땅굴 내부 모습. 1978년 아군에게 발견된 제3땅굴은 문산까지의 거리가 12㎞, 서울까지의 거리는 52㎞지점에 있다. 폭 2m, 높이 2m, 총길이는 1635m로 1시간당 무장군인 1만명의 병력이동이 가능하다.


▲삶의 터전 DMZ

DMZ와 그 일원은 전쟁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살아 온 평범한 삶의 터전이었다.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은 경기도 4개소와 강원도 6개소 등 모두 10개소에 1000여가구 2600여 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 훨씬 이전부터 더 많은 사람이 살았다. 1910년대 DMZ 내에는 총 427개 마을에 약 4600동(강원도 2388동, 경기도 2238동)의 가옥이 있었다. 강원도에는 183개(43%), 경기도에는 244개(57%)의 마을이 있었다.<김창환, DMZ지리 이야기>

해방직후 대성동은 50세대 200여명이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조상대대로 농업을 생업으로 살았으며, 교통이 불편한 가난한 벽촌이었다. 부근에는 어용리(현 어영개 부근), 조선동(현 조산 부근), 광명동(현 굉캐 부근), 냉정동(현 찬우물 부근), 방축동(현 방추골 부근)의 5개 마을이 있었다.<강진갑, 경기지역의 역사와 지역문화>

이렇게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에는 70개 마을이 있었으나, 전쟁이 끝나고나서는 주민들의 거주가 금지되고 판문점 인근 대성동에만 거주가 허용됐다.

경기도내에는 DMZ 마을인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대성동 자유의 마을)에 57세대 211명과 민통선 마을인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통일촌)에 163세대 440명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해마루촌)에 67세대 169명 △연천군 중면 횡산리에 30세대 71명 등 4개 마을에 317세대 891명이 살고 있다.
 

   
▲ 파주 문산 황희 정승의 반구정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변 철책선.



▲'자유의 마을' 대성동

대성동은 휴전선 남쪽 비무장지대(DMZ) 안에 57세대 211명이 살고 있는 분단체제의 산물이다.

지난 3월에는 개봉 영화관 '대성동 롯데 개봉관'이 생겼다. 마을회관 2층에 52석 규모로 마련됐다.
이 마을은 판문점에서 1㎞, 개성에서 11.5㎞, 군사분계선과는 불과 400m 떨어졌다. 마을 건너 군사분계선 너머에는 북한의 비무장 지대 마을인 '기정동마을'이 있다. 대성동 마을과 기정동 마을의 거리는 불과 800m에 불과하다.

이런 지역적 특수성으로 이 마을은 한국휴전협정(제1조10항)에 따라 대한민국정부가 아닌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1967년부터 주민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졌고, 1969년에 주민등록증이 발급됐다.

대한민국 법률과 통치가 전혀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지대는 아니다. 대성동 주민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이들이 범법 행위를 하면 일단 대성동에서 추방되는 형식을 거친 후, 대한민국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유엔군사령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무관심으로 한동안 버려진 땅이됐다.

사건이 일어났다. 1958년 12월8일 자정, 주민 이대성이 살해됐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가족들이 모두 잠자고 있는데 헌병대에서 나왔다는 5~6명의 사람들이 남편을 끌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씨의 시체는 마을 근처에서 발견됐다. 유엔군은 이 사건을 북한군이 살해한 뒤 유엔군이 살해한 것으로 조작한 사건으로 규정지었다.

이후 정부는 대성동을 하나의 이상촌을 만들기 위해 주택개량과 경지정리, 기반시설 확충 등 다양한 지원사업들을 펼쳤다.

지금은 마을 주민 대부분, 농사를 짓고 소득이 높은 편이지만 야간 통행에 제한을 받고, 장기 출타할 때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여전히 여러 제약을 받고 있다. 또 마을 운영은 부락 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엔사가 제정한 지침인 '대성동 민사규정'에 따른다.

주민투표로 선출된 이장이 마을의 전반적인 관리 및 복지, 행정에 대한 책임을 진다. 특히 이곳 주민들은 참정권과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고 있다.

또한 대성동 아이들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인근에 3개의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전쟁으로 폐교됨에 따라 4~5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비정규 교육을 받았다. 정부는 1968년 대성동초등학교를 정식 인가했다.

대성초교 최미경 교사는 "지금까지 16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현재 교직원 21명에 초등생 30명, 유치원생 5명이 재학하고 있다"며 "2007년 폐교 위기에 놓이자 2008년부터 학구를 대성동 마을에서 파주시 전역으로 확대하면서 지원 학생수가 많아져 현재는 추첨을 통해 입학한다"고 말했다.



▲'장단콩' 마을 통일촌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으로부터 5~20㎞ 남쪽에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민간인 통제선이 설정되어 있는데, 민간인 출입통제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의 지역이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그곳에 통일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통일촌은 1972년 대통령이 전방시찰 도중에 "재건촌의 미비점을 보완한 전략적 시범농촌을 건설하라"는 지시에 따라 1973년 조성된 마을이다.

이전에 조성된 재건촌이 종합개발계획 없이 영세민을 입주시킴으로써 야기시킨 문제점을 보완토록 지시한 것이다. 그래서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 두 곳에 지어졌다.

입주대상자는 군복무를 필한 사람, 전과가 없는 사람 등 까다로운 조건을 갖춘 사람 중에서 선정했다. 그 결과 백연리 통일촌에는 제대를 앞둔 하사관 40세대와 지역 원주민 40세대 등 총 80세대가 입주했다.

당시 입주자에게는 전답을 합해 총 200㏊의 경지가 제공(호당 2.7㏊)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통일촌의 특산품이 '장단콩'이다. 장단은 콩의 품종이 아니라 지명이다. 장단콩은 6·25전쟁 이후 장단지역의 대부분이 민통선 이북에 포함되면서 사라졌다가 통일촌이 조성되면서 다시 재배됐다.


 

   
▲ DMZ 생태마을 해마루촌 입구


▲생태마을 해마루촌

'해마루촌'이라는 이름은 지명 '동파리(東坡里)'를 우리 말로 풀어서 쓴 이름이다.
"5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고향을 떠난 지 50여년 만에 다시 돌아왔지요."

해마루촌에서 5년째 이장을 맡고 있는 정재겸(66)씨는 서울에서 살다가 인생 황혼을 바라보는 때에서야 고향에 정착했다. 해마루촌은 숙박시설 등을 갖춘 마을 복지관에서 팜스테이가 가능한 녹색농촌체험마을이다. 1998년 옛 장단군이 고향인 실향민 1세대와 2세대들을 위해 조성, 현재 67세대 169명이 살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나이든 사람이 많아 직접 농사를 짓기보다는 대부분 위탁영농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도둑이 없고, 집집마다 울타리도 없다"는 정씨는 주요 길목 곳곳에 신세대 군인들이 검문(?)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흐뭇하게 웃는다. 특히 이곳 마을을 위성에서 보면 높은음자리표 형상을 띠고 있어 '높은음자리표 마을'이라는 별칭이 있다. 그래서 음악가가 사는 마을이냐는 질문을 받곤한다. 퇴직 공무원과 현직 대학 교수,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서 문산읍까지는 20분 걸리는 버스가 하루에 5번 운행되고 택시도 다닌다. 다만 의료혜택과 문화혜택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요즘 정씨에게 마을 숙원사업이 하나 있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자연하천 '해마루천'을 생태하천으로 만들어 관광객과 주민의 휴식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며 "시에서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60여년 전 치열한 격전지였던 이곳에 지금은 봄이면 지천으로 철쭉꽃이 피고, 여름에는 개똥벌레인 반딧불이를 볼 수 있고, 겨울이면 기러기와 청둥오리, 검은 독수리 등이 북쪽 소식을 전해준다.

황희 정승이 반구정에서 지켜보았던 임진강이 마을 앞쪽으로 굽어 흐르고, 농장이나 축사 등 오염원이 전혀 없는 청정지역이다. 그러다보니 높고 맑은 밤하늘은 별자리를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에게 그만이다.

"또 찾아오라"는 인사를 건넨 정씨를 뒤로 하고 도로를 따라 5분쯤 달려 1번 국도로 접어들자 '서울 56㎞, 평양 205㎞'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글 이동화·사진 김철빈기자 itimes21@i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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