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600년 천년을 내다본다
   
▲ 농촌운동가 일가 김용기 장로가 설립한 하남시 풍산동 가나안 농군학교 입구. 김 장로는 이곳에서'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며 개척정신과 근검절약을 교육하고 실천했다.


"경기도는 명현들의 정신을 교육하고 전도하면서 지어지선(至於至善)을 구현하는 대동세계를 만들어가는 살기좋은 땅, 명당이다."(윤여빈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경기도는 명현(名賢)의 고장이다. 그들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누대에 걸친 마을들이 많다.

도립리와 봉안마을, 덕봉마을 등이 그런 곳이다.

이천 '도립리(道立里)'의 이름은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이 서면 도(道)는 저절로 생긴다. 논어 학이편)'이란 말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조선 중종 기묘사화 때 낙향한 남당(南塘) 엄용순(嚴用順)을 비롯한 6명의 선비가 시를 음영(吟詠)하던 육괴정(六槐亭)이 있다.

남양주 봉안마을은 농촌운동가 일가(一家) 김용기(金容基, 1908~1988) 장로가 일제 때 잘사는 마을,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이상촌(理想村)을 꿈꾸었던 곳이다.

그 정신은 오늘날 가나안 농군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안성 덕봉마을은 해주 오씨의 집성촌으로 경기도 유일한 선비마을이다. 조선 후기 정치가 오두인(1624~1689)의 위패를 모신 덕봉서원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 김용기 장로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봉안 이상촌'을 꿈꾸었던 봉안마을에 있는 봉안교회.


▲이천 도립리와 육괴정="이천은 일승지지(一勝之地)로 만성(萬姓)의 고향이다."(이천 설봉서원 한승남 원장)

이천은 조선시대 제1의 피난처였고 많은 성씨들이 이곳에 피난와 살았다. 사람이 살기에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다는 반증이다. 조선 양녕대군과 경신공주, 기묘년 괴정육현(槐亭六賢) 등 왕족과 명현들의 숨결이 남아있다. 3판서 9옥당을 배출하며 600년을 세거한 영월 엄씨의 못자리 터이기도 하다.

외적이 침입할 때는 바다는 물론 강을 타고 들어왔다. 고려를 망하게 한 여진족과 몽고, 홍건적이 그랬다. 조선시대에는 왜구가 그랬다.

"왜구들이 낙동강을 타고 안동·예천까지 올라와 식량을 약탈하고 민가에 불을 놓아 초토화시켰다.

급기야 섬진강과 금강, 한강을 타고 김포·한양·광주·여주·충주·제천·철원 등 내륙 깊숙히 침입했다.

공양왕 2년(1390년)에는 청미천을 타고 장해원(長海院, 오늘날 장호원)까지 올라왔다"고 한 원장은 말했다.

즉, 뱃길이 닿는 곳이면 왜구의 위협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만성씨(萬姓氏)의 조상들이 뱃길과 거리가 먼 이천으로 피난와서 종족을 유지하고 살다가 국가가 안정되자 되돌아 갔다는 것이다.

한 원장은 "호암산 돌맥이 복하천을 가로질러 지중보(地中湺)를 형성해 지하수가 풍부하고, 원적산 아래에는 금반형지(金盤形地)가 12곳이나 있다고 할 만큼 살기좋은 명당이 많은 곳이다"고 말했다.

이섭대천(利涉大川, 큰 내를 건너 세상을 이롭게 한다)의 이천(利川)은 북쪽 외벽을 형성하고 있는 광주산맥의 정점, 원적산(圓寂山, 634m)을 따라 동으로는 여주군, 서로는 광주시와 경계를 이룬다.

산 밑으로 신둔면과 백사면, 여주 흥천으로 이어지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산줄기를 따라 형성된 나즈막한 구릉과 넓은 들, 여기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조건중 하나인 수량이 풍부하고 풍수해(風水害)가 거의 없는 곳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이상정치를 지향하던 사림들이 사화를 피해 대거 은거한 곳이 백사면 도립리 육괴정이다.

당대의 명현인 엄용순(嚴用順), 김안국(金安國), 강은(姜隱), 오경(吳慶), 임내신(任내臣), 성담령(成聃齡) 등 6명의 선비가 그들이다.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우의를 기리자는 뜻으로 원적산 아래에 여섯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고 후세에 이들을 괴정육현(槐亭六賢)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육괴정은 경기도 충효문화의 상징이자 이천시 정신문화의 요람이다.

이들 명현들이 심기 시작한 산수유 덕분에 오늘날 산수유 축제가 열리고 있다.

또 도립리에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반룡송(蟠龍松)이 승천을 기다리고 있다.


▲봉안 이상촌=남한강과 북한강이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소리없이 한몸이 되어 속살을 섞으며 흐르는 한강이 보이는 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은 가나안 농군학교 설립자 일가 김용기 장로가 처음으로 이상촌(理想村)을 꿈꾸며 '봉안 10가촌(十家村)'을 형성했던 그의 고향마을이다.

마을 들머리를 조금 지나면 100년 역사를 간직한 담쟁이 덩굴의 봉안교회(담임목사 김봉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가의 사촌 조카로 고향을 지키고 있는 봉안교회 김영구(65) 장로는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뜻을 지난 10명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가나안 땅을 일구어, 항일운동과 나라사랑의 터전을 만들고자 했던 곳이다"고 했다.

일가의 집터는 최근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져 내렸다. 다만 집터 주변에 당시 심었던 무궁화 나무가 아름드리 고목이 되어 조그만 흔적으로 남아있다.

일제의 공출 품목에 없던 고구마를 심고 산비탈을 개간해서 염소를 키웠고, 인공 저수지까지 축조했다고 한다.
특히 1943년 몽양 여운형이 이곳 식구들과 뜻을 같이 하며 한동안 살았다고 한다.

농촌 이상향을 꿈꾸었던 이들은 여기서 버려진 산판(山坂)을 구입해 주생활, 식생활, 의생활 개선 운동을 10여년간 벌였다.

<우리 고장 남양주>(남양주 문화원)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먼저 집집마다 가축과 과수를 심게 하고 과목 사이에 고구마를 심었다.

특히 고구마 농사는 당시 마을 내의 부족한 식량을 해결함과 동시에 농가수입을 증대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환경 개선, 식생활 개선, 농업 기술 보급, 상·혼·제례 간소화 등 정신 개조를 통한 애국정신 함양에도 크게 힘썼다.

또한 봉안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된 청년회에서는 농촌 내의 유소년·청년 대상의 교육계몽운동과 야학운영 등을 통해 문맹퇴치운동도 전개했다."

'봉안 이상촌'은 개신교를 중심으로 농촌·농민운동,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한 애국계몽운동 실천의 장이었다.

'봉안 이상촌'은 김 장로가 1946년 서울 은평구 구기동 '삼각산 농장' 개척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어졌다. 김 장로는 이어 1952년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 '에덴향'을, 1954년엔 하남시 풍산동에 '가나안 농장'을 건설했다.

이렇게 정착한 지금의 가나안 농군학교는 한국 농촌의 근대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대표적인 농촌운동이라면, '봉안 이상촌'은 요즘 일고 있는 '마을 만들기 운동'의 선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곳 능내리는 열수 정약용(조안면 능내리)과 몽양 여운형(양평군 양서면), 일가 김용기 장로라는 근현대사의 거목들이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활동한 근거지, 살기좋은 곳이었다.

지금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여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청정지역으로 남아있다.
 

   
▲ 기묘사화 때 낙향한 6명의 선비가 학문을 논한 육괴정.


▲안성 덕봉마을=해주 오씨의 집성촌으로 유일한 선비마을이다.

이 마을이 400년 넘게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충정공(忠貞公) 오두인(1624∼1689)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68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인현왕후 민씨 폐위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국문을 당하고 귀양가던 도중에 별세했다.

그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 백성의 교육을 위한 덕봉서원이 있다.

해주 오씨들은 오두인의 증조부인 오정방 때부터 양성면 덕봉리 종중산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고 한다.

약 45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종산(宗山)을 지키고 관리를 해오면서 시제를 모시고 있다. 덕봉리에는 아직도 70가구의 해주오씨 종친들이 토박이 정신으로 끈끈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글 이동화·사진 김철빈기자 itimes2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