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600년, 천년을 내다본다
   
▲ 화성 능행도의 8첩 병풍 가운데 하나인'노량주교환어도'. 노량진에 설치된 주교(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창덕궁으로 환어하는 어가행렬이다.

2. 600년의 역사 '문화원형'을 찾아서(인문·자연·역사) 3-1. 사통팔달 왕도의 길

▲역사가 깃든 경기도길
모든 길은 경기도를 통했다. 그 길은 왕도(王道)며 치도(治道)요, 백성의 길이었다. 그 길에는 희노애락이 배어 있고 역사가 깃들어 있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금의환향한 길, 혼례를 앞둔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설레는 길, 전쟁의 슬픈 피난 길, 독립자금을 구하러 가던 의로운 길 등.

길은 한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 간다. 길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소통의 길이자 창조의 길이요, 구도(求道)의 길이었다.

오늘날 처럼 조선시대에도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있었다.

영조 대에 간행된 관찬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기준으로 하자면 한양에서 전국 각지에 이르는 길은 크게 9개로 구분되는데 이 모든 길은 반드시 경기도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이외에도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의 '도로고'가 6개의 길을, 김정호의 '대동지지'가 10개의 길을 제시하고 있으나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다.

경기도를 지나는 주요 길은 ▲삼남로(한양~해남) ▲영남로(한양~동래) ▲평해로(한양~평해) ▲경흥로(한양~함흥·서수라) ▲의주로(한양~의주) ▲강화로(한양~강화) 등이다.

특히 '삼남로'는 조선의 실크로드로 한양과 충청·호남·영남의 삼남지방을 유기적으로 잇는 중요한 길이었다.

삼남로는 여말선초의 정치가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를 가면서 정치개혁의 의지를 다졌고, 정조대의 실학자 정약용이 개혁의 좌절을 곱씹으며 강진으로 유배를 갔던 길이다. 또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순신이 전라좌도에 부임하면서 달렸던 길이요,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던 길도 이 길이었다. 그리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 많은 민중들도 이 길을 걸었다.

이때까지 도로는 사람과 우마차의 길이었으며, 자연과 더불어 형성된 길이었다. 그러나 1906년 최초로 '신작로'라 불리는 자동차 통행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길은 자동차가 점령했다. 사람보다 차가 우선이 된 것이다.

로마에 세계로 통하는 세계 최초의 도로망인 아피아 가도(Via Appia)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전남 목포에서 경기도를 거쳐 평북 신의주까지 긴 여정을 지닌 국토 종단 길, 1번 국도가 있다.

당초 1번 국도는 정조 때 기본노선이 만들어진 후 점차 도로 폭을 넓혀갔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전까지 국토의 대동맥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1950년대까지 주된 교통수단은 철도였다. 1905년 개통된 경부선은 용산~안양을 거쳐 수원~병점~오산으로 이어져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노선이었고, 수 많은 조선인의 피와 눈물로 건설됐다.

철도는 수탈의 역사였다. 1930년 수원~여주간 수여선, 1937년에는 수원~인천간 수인선이 개통되어 이천·여주 등지의 식량자원이 수원을 거쳐 인천항으로 집결됐다. 이처럼 경기도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였다.
이제, 왜 사람들은 곧게 뻗은 신작로가 아니라 좁고 꼬불꼬불한 옛길을 찾는 걸까?
 

   
▲ 안양시 석수동에 있는 만안교(萬安橋). 정조대왕이 화성에 모셔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를 위해 1795년에 조성한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로 안양지역에서 거북다리·대왕교 또는 효자교로 불린다. 아치형에 7개 수문이 있는 교량의 길이는 35.55m(하천 폭의 교량 31.75m), 너비는 7.8m, 높이 4.35m이다. /사진제공=안양시


▲정조의 원행길
1762년(영조 34) 윤 5월12일 뒤주가 놓인 휘령전(徽寧殿, 현재의 문정전) 마당에서 세자는 마지막으로 절규한다.

"부주(父主 아버지 왕)여! 살려주소서!" 영조는 손수 뒤주의 뚜껑을 덮고 자물쇠를 채웠다.

이렇게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왕위에 올라 내뱉은 첫 마디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이후 정조는 아버지가 묻혀 있는 수원화산 현륭원을 13회 행차했다. 이때 숙소는 현륭원 재실과 화성행궁이었다. 1795년 이전까지는 정조가 궁을 출발해 화성 현륭원으로 향하는 길은 노량 배다리를 건너 용양봉저정~만안고개~금불암~사당리~남태령~과천행궁~찬우물~인덕원천교~갈산점~원동점~사근평행궁~지지대고개~화성행궁~상류천~하류천~용주사~현륭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1795년(정조 19)년에는 그 길에 변화가 생긴다. 과천을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든 시흥길을 이용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1795년 을묘년 행차는 특별했다. 동갑이었던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회갑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소에서 전배(展拜)를 한 후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베풀 계획이었다. 그런데 연로한 어머니가 고갯길이 많은 기존의 과천길을 이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새로운 길 조성을 논의했다.

 

   
▲ 정조의 능행길

'정조실록 39권 정조 18년 4월2일' 기록을 정리하면 경기감사 서용보가 "과천 지역은 고갯길이 험준하고 다리도 많은 반면 금천길은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현저한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대가 평탄하고 길이 또한 평평하고 넓으니 이 길로 정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현륭원을 찾기 위해 1789년부터 이용하던 과천길을 대신할 새로운 원행길 '시흥길'을 1794년 조성했다.

마침내 1795년 윤 2월 정조는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새로 만든 길을 따라 행차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토대로 창덕궁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길을 정리하면 이렇다.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해 돈령부 앞길~종로 앞길~광통교~숭례문~청파교~배다리~노량행궁~용양·봉저정~만안현~번대방평~문성동 앞길~시흥행궁~만안교~사근평행궁~일용현~미륵현~괴목정교~진목정교~장안문~종가~좌우군영앞길~신풍루~화성행궁~팔달문~상류천~하류천~대황교~유첨현~만년제~현륭원까지다.<'원행을묘정리의궤' 권2, 절목>

서울에서 현륭원까지 83리(18세기 후반 1리는 5.4㎞)에 이른다. 화성을 찾는 원행대열은 말을 타고 5행 또는 11행으로 열을 지어 행차했다. 길의 너비가 약 7~10m 정도였다.

조그만 이 길은 19세기 말에는 조선 10개 대로에 들어가는 큰 길이 됐다.

개혁 군주 정조가 한발한발 내디딘 그 발자국에서 우린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원행을묘정리의궤' 국역판(수원시) 참조>

/글 이동화·사진 김철빈기자 itimes21@itimes.co.kr

   
▲ 조선시대 경기도 주요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