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인재정책'탕평책'… 화성 건설·규장각 설치 업적도
여진정벌 윤관·홍건적 소탕 최영·일제항거 최익현 배출
'성리학 대가'이이 … 이익'실학'근대 자연·과학발전 기틀
   
▲ 용주사 처마단청 문양


600년의 역사 '문화원형'을 찾아서(인문·자연·역사)
1-2.큰 인물을 낳다(역사인물 20인)

● 개혁군주 정조대왕
"정조는 열린 인재정책을 폈다. 우리가 기억하는 정약용, 박제가, 김홍도를 비롯한 숱한 인재들은 그의 대통합 탕평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원 화성을 축조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와 함께 화성 융건릉에 잠들어 있는 정조(正祖, 1752~1800)는 조선 제22대 왕으로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탕평을 통해 정적을 포용하는 대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1762년 어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극의 죽음을 당하면서 지난한 과정을 거쳐 25살 때 왕위에 올랐다.
정조가 추진한 개혁의 총결산은 수원 화성 건설이다.

김준혁 경희대 교수는 "정조가 장헌세자의 원침을 수원으로 옮긴 것은 이 지역을 친위지역화하고 본격적 개혁의 진원지로 삼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서였다. 이러한 정치적 의도는 수원 읍치 이전과 상권부양책의 추진, 장용외영 주둔, 화성 축조로 구체화 되어 갔다"며 "성곽문화의 꽃으로 불리고 있는 화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닌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해 완벽하게 건설된 도시 성곽이며, 세계 최초의 계획도시라는 점에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자신의 저작물을 정리한 <홍재전서>(184권 100책)가 있다.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했으나 당쟁은 사색당파에서 정조의 정책노선에 찬성하는 시파(時波)와 그에 맞서는 벽파(僻波)로 갈라졌다.

특히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인(委巷人)들이 귀족문화와는 달리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찬란한 문예부흥기를 맞는다.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한파 등의 장점을 수용,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했다."<정옥자 한국학중앙연구원>
 

   
▲ 수원화성 서북각루


● 외세침입 맞선 윤관·최영·최익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처음으로 여진정벌의 임무를 띤 때부터 1111년(예종 6) 죽을 때까지다."<이희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를 외침으로부터 지킨 윤관(尹瓘, ?~1111)은 파주 광탄에 묻혀 있다. 일반인들은 무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다.

그는 첫 전투에서 여진의 기병에 부딪혀 패전했으나 임기응변으로 그들과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한 후 별무반(別武班)이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1107년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해 동북9성을 축조했다.

그러나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 여진족들이 조공을 약속하자 고려 정부는 9성을 되돌려 준다. 결국 여진정벌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패장의 모함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위화도회군을 단행하는 이성계의 세력을 막으려 했으나, 막대한 원정군을 지휘하는 그를 막을 수 없어 도성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고려 말기의 군벌(軍閥) 대립에 있어서 고려왕조를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이 고려왕조를 부정하려는 신진 군벌에게 패배를 당한 셈이 되는 것이다."<민병하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조대왕 능행차시연 중 격쟁을 벌이고 있다. 격쟁은 조선시대 때 왕 행차시 억울한 사연이 있는 일반 백성들이 읍소 하는 것을 말한다

고려의 명장이요 재상이었던 최영(崔瑩, 1316~1388)은 안으로 수차례 역적의 무리를 진압하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를 소탕했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감행하다가 4불가론을 내세워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잡혀 고향인 고봉현(高奉縣, 지금의 고양)에 유배됐다가 참수됐다. 고양 덕양구 대자동에 묻혀있다.

원·명 교체기인 1388년 명나라는 전에 원나라가 차지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며 강계에 철령위를 세웠다. 이에 조정은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꾀했던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오적의 처단을 주장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수단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됐다."<홍순창 한국학중앙연구원>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위정적사의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포천 출신이다.

그는 14세 때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애국·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73년 올린 '계유상소'는 대원군의 10년 집권을 무너트렸다.

여러 관직을 거치며 불의·부정을 척결한 조선의 선비였던 그는 병자수호조약 체결과 단발령에 반대하다 유배를 당한 위정척사(衛正斥邪)파의 대표 인물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전북 태인에서 유림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척사론이 가지는 의의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성과 이를 모방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비판한 데 있다." <유승국 전 정신문화연구원장>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제에 체포돼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일본 음식물을 거부하고 순국했다. 그의 항일·구국정신은 안중근 장군, 백범 김구, 이봉창 의사 등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 조선의 대학자 이이·이익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에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율곡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된다."<이동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성리학의 대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인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그는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지만 파주에서 성장하고 공부했으며, 어머니와 함께 파주 자운서원 뒤에 묻혀있다.

8세 때 파주 율곡리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으며,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선조에게 시무십조를 바치고 각종 개혁안을 주장했다.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나라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해 폐법 개혁을 강조했다. 그의 학문은 기호학파로 계승됐으며, 기호학자는 서인세력이 중추를 이뤄 조선 후기까지 정치를 주도했다.

화석정에는 임진왜란 때 서울을 버리고 떠난 선조 일행이 임진강에 도착했지만 비바람에 등불을 밝힐 수 없을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은 놓아 선조 일행이 강을 무사히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이가 앞날을 내다보고 화석정의 관솔에 기름을 먹여뒀다는 것이다.

-"이익은 유형원의 학문을 계승해 조선후기 실학을 대성했다.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윤석산 한양대 교수>

토지를 바탕으로 개혁을 꿈꾼 실학의 선구자 이익(李瀷, 1681~1763)은 안산에 있는 생가 터인 성호장(星湖裝)에서 성장했으며, 과거를 단념하고 두문불출 독서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3천여편의 글을 남긴 그는 최고의 칼럼 리스트였다.

그의 제자인 안정복과 이가환, 이중환, 권철신 등은 안산과 여주, 광주,양평 등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며 성호학파를 형성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학을 수용한 그는 자연법칙과 사회법칙을 동일시하는 천인합일설을 배제하고 자연현상은 자연현상으로 파악하는 단서를 열어 놓았다.

이런 자연관은 제자 권철신을 통해 정약용으로 이어져 근대적 자연관과 과학정신을 낳는 계기를 제공했다. 재부(財富)의 원천을 토지에 두고 한전법(限田法) 실시를 주장했다.

/이동화기자 itimes2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