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서자 인천 - 지역언론과 인천의 정체성
   
▲ 1973년 정부 주도로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 내 3개 신문사 통합추진위원회가 꾸려지고 같은 해 9월 1일 인천의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가 경기신문으로 강제통합됐다. 1973년 7월31일 인천올림포스 호텔에서 열린'3사 통합대회'장면. /자료제공=인천언론사(㈔인천언론인클럽 발행)


<글 싣는 순서>
1 대중일보와 인천언론의 시작
2 강요된 '언론공백'
3 1988년 민주화와 지역언론의 부활


"그동안 도내에서 3사로 각기 존재하던 일간신문은 자율적인 분위기와 조정으로 한 개 사로 통합되었으며 9월1일에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경기신문(京畿新聞)'이란 새 언론운영체가 탄생되어 … "
1973년 경기도 수원에 근거지를 둔 연합신문 8월 15일자 1면에 실린 '건실은 부동의 진리'란 제목의 기사 일부다. 연합신문은 같은 해 9월1일 경기신문으로의 제호변경을 보름 앞두고 있었다. 8월15일자 기사는 제호변경이 단순히 간판을 고쳐 거는 일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인천언론의 두 큰 줄기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에 대한 강제통합을 '대승적' 차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합리화였다. 그 속살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소위 '1도(道) 1사(社)' 언론탄압책이었다. 경기신문의 3사 통합 후 인천은 1988년 7월까지 15년 가까이 언론없는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신문(新聞)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새로 듣는다'는 뜻이다. 인천은 시민은 있으되 시민의 소리를 새롭게 듣고 글로 적어 서로 나눌 수 없는 도시가 됐다.

 

   
▲ 경기신문으로의 통합을 하루 앞둔 1973년 8월31일 발행된 경기매일신문 종간호(9천18호) 1면.


▲ '3사 통합', 울분과 회한의 퇴장

인천언론의 상실, 언로(言路) 차단의 시작은 1972년 10월 유신선포였다. 전국에서 반(反) 정부 행동이 들끓으면서 두 달 뒤인 12월6일 국가 비상사태 선포가 이어졌다. 유신정권은 언론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듬해 '1도 1사' 언론정책에 따라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 내 언론 3사에 대한 통폐합 결정이 내려졌다.
특정 정보기관이 주도했다고 알려진 1973년 7월 31일 '3사 통합대회'는 연합신문 주도로 인천의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를 통합한다고 공표했다.
남은 기간은 한 달이었다. 통합과정은 가차없었다. '통합 경기신문' 첫 호가 발행되기 하루 전 정부는 경기매일신문의 통합동의를 강제로 이끌어냈다. 당시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이던 김형희는 2003년 8월 인천언론회보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973년 8월31일 송수안 경기매일신문 발행인과 편집국장이었던 나는 그날 오후 6시 인하공사(중앙정보부 인천분실) 지하실로 연행당했다. …(중략)… 밤 11시30분 군화의 둔탁한 굉음이 계단 쪽에서 울려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찍어!"하며 내미는 서류를 훑어보니 '3사 통합하는 데 찬성한다'는 것과 '9월1일부터는 경기매일신문을 발행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다."
앞서 1973년 8월10일. 경기매일신문은 '지령 9천호'를 냈다. 1945년 10월 인천 첫 한글신문 대중일보로부터 면면히 내려온 9천번 째 신문이었다.
9천호는 슬펐다. 지면 곳곳은 강제통합과 폐간을 애통해하는 울분으로 채워졌다.
전신인 인천신보(1950년 9월 창간) 시절부터 경기매일신문을 이끌어왔던 편집인 고(故) 조수일은 '9천 층의 바벨탑'이란 제목으로 9천호를 맞는 소회를 써 내려갔다.
"우리 모두가 먼 훗날까지 찬란한 영광의 기억을 되새기며 살아갈 것을 마음 먹으며 서글픈 넋두리에 그치는 것이다."
이날 자 사설 '애환 얼룩진 금자탑 - 본보 9천호를 내놓으면서' 역시 경기매일신문의 역사와 통합의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이후 21일이 지난 1973년 8월31일 지령 9천18호 경기매일신문의 종간호가 발행됐다. 논조는 담담했다. 신문 어디에도 통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종간사도, 사설도 없었다.
1945년 10월7일 대중일보로 시작된 27년 10개월 남짓한 역사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인천언론의 또 다른 줄기 경기일보도 1973년 8월31일 지령 2천33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1966년 2월22일 인천 중구 신포동 국제빌딩에서 창간한지 7년 6개월 만이었다.
8월31일자 마지막 사설을 대신한 폐간사는 경기매일신문과 마찬가지로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을 담고 있다.
"오늘로써 경기일보를 폐간한다. …(중략)…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취한 일이기에 이제 구차스러운 이야기를 남길 일은 하나도 없다. 다만 경기일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신문이 해야 할 온갖 사명을 다 했던가 그것만이 뉘우쳐질 뿐이다."

 

   
▲ 박정희 군부정권의 1972년 10월'유신선포'는 이듬해'1도 1사'라 불린 언론탄압 정책을 낳았다. 3사 통합에 따른 인천언론의 상실이 이 정책에서 시작됐다.1961년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육사생들의 5·16 군사쿠데타 지지행렬을 당시 박정희 소장(왼쪽)과 군 참모들이 지켜보고 있다./연합뉴스


▲ 순식간에 사라진 27년 역사

광복 후 인천언론의 계보는 세 줄기를 이뤘다.
'대중일보→인천신보→기호일보→경기매일신문'이 하나, '인천신문→경기연합일보→연합신문'이 다른 하나, 마지막이 '경기일보'다.
1945년 10월7일 대중일보 창간부터 1973년 8월31일 3사 통합까지 27년 10개월 동안 형성된 계보다.
사실 긴 세월 견실히 이어져온 인천지역 언론 계보의 '종말'은 1969년 4월28일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신문으로부터 발전한 경기연합일보가 본사를 인천에서 수원으로 옮겨간 것이 그 단초였다.
10년 가까운 역사를 뒤로 하고 경기연합일보가 두 달 만에 근거지를 수원으로 옮기게 된 배경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경기연합일보의 전신(前身) 인천신문을 설립한 허합 사장의 퇴진이었다. 1969년 1월 허 사장은 수재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은 뒤 경영에서 손을 뗐다.
한 달 뒤 1969년 2월 무역업과 영화 제작으로 이름을 떨치던 불이무역 이현수 사장이 경기연합일보를 인수하고 두 달 후 수원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그리고 그 해 7월 훗날 경기도 언론 3사 통폐합의 주역이 된 홍대건이 상무로 경영전면에 나섰다. 그렇게 해서 1970년 10월1일 연합신문이 탄생했다.
그 이전만 해도 경기도 수원에는 신문사가 하나도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 연합신문이 등장하고 3년 만인 1973년 9월1일 경기신문 창간과 함께 인천에서 터를 지켜온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를 흡수·통합한 것이다.
이 때부터 경기도 내 언론의 무게중심은 인천에서 수원으로 옮겨갔다.


▲ '직할시' 승격 무색, 독자언론 길 막혀

인천언론의 세 줄기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은 경기매일신문이었다. 가장 긴 역사와 가장 많은 인력·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970년엔 지역언론 중에선 유일하게 7층 규모 신사옥을 지었고 고속윤전기도 갖췄다.
유신정권이 '1도 1사' 정책을 추진했을 때 그 주체가 연합신문이었다는 데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었던 이유다. '인천언론사'는 통합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경기매일신문 기자들 사이에서는 …(중략)… 자신들의 회사가 아니고 연합신문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데 이해를 못하겠다는 불만들을 쏟아냈다. 이것은 통폐합이 아니라 "신문사를 강탈해 가는 게 아니냐"며 삼삼오오 모여 대책을 논의해 보기도 했다."
'통합 경기신문'은 1973년 9월1일 경기도 수원시 교동 136번지에서 창간호를 냈다. 1도 1사라는 유례 없이 좋은 기반 위에서 해마다 사세를 키워갔다. 하루 4면이던 신문 면수는 창간 4년 뒤 8면으로 늘어났다.
1979년에는 당시 서독 하이델베르그사(社)의 첨단 컬러인쇄기 3대를 도입해 인천·경기지역 언론사로선 처음으로 자체 시설에서 컬러판 신문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1982년 3월1일에는 제호를 지금의 '경인일보(京仁日報)'로 바꾸고 발전을 계속해 갔다.
그러나 인천은 1981년 7월 직할시로 승격됐음에도 여전히 독자적 언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정권의 언론통폐합에 이어 1980년 전두환 군부정권이 또 다시 통폐합조치를 내리면서다.
인천언론의 '부활'은 1988년 7월15일 '인천신문(仁川新聞·현 인천일보)' 창간에 와서야 실현됐다. /노승환기자 berita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