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언론과 지역문화'바른 줄기'


<글 싣는 순서>
1 대중일보와 인천언론의 시작
2 강요된 '언론공백'
3 1988년 민주화와 지역언론의 부활


 

   
▲ 대중일보는 해방 후 인천시민 손으로 만든 명실상부 인천언론의 첫 시작이었다. 1945년 10월7일 대중일보 창간호 1면. /자료=인천언론사(㈔인천언론인클럽 발행)

"인천항이 이제 새 시대 해외 제국과 교섭하는 문호가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귀 신문이 해야 할 정치적·문화적 역할은 자못 중대하다" - 시인 임화
"신문의 존재 이유는 정확하고 신속한 보도와 공정한 여론의 반영에 있다" - 지역원로 신태범
1945년 10월7일 인천언론의 효시 '대중일보(大衆日報)' 창간호와 이튿날 제2호에 각각 실린 축사다. 다음달 7일이면 어느덧 대중일보 창간 66년이 된다. 본질을 알기 위해 기원으로 돌아가라는 주문은 사회과학에선 하나의 오랜 전통이다. 인천일보가 대중일보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인천 언론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고난의 행군'이라 부를 법한 세월도 이미 오래다. 시인 임화와 지역원로 신태범의 66년 전 일성은 그래서 더욱 하나의 지표임이 분명하다. 인천언론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은 다시금 우리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다.


▲인천언론의 개화

대중일보는 인천에서 인천인들이 처음 국문으로 만든 신문이었다. 한문이 많았지만 문장을 이루는 기본 틀은 우리말이었다. 1945년 10월7일. 광복된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를 벗어나 우리의 독자적 언론을 세우자는 열망이 가득했던 때였다. 이를 반영하듯 대중일보 창간은 서울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복간보다도 빨랐다.
대중일보 창간 이전에도 인천에 언론은 여럿이었다.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1890년 1월28일 창간된 인천 첫 신문 '인천경성격주상보'가 있었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36년 일제 식민통치 기간 내내 인천의 신문들은 백성의 공기(公器)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신문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들을 위해 존재했다.
대중일보는 창간호부터 지역언론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제1호 1면 머리에 올려진 창간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 제54회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한국 함기용·송길윤·최윤칠 선수가 나란히 1·2·3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한 1950년 4월20일자 호외. /자료=인천언론사

'인천은 우리 수도의 관문이며 동시에 공업산업의 심장부인 만큼 대외적 교역이 이로조차 번창하고 국내적 생산이 여기에서 융성할 것이니 국가와 함께 본지가 같이 성장하면서…'
국문발행, 시민주도, 인천의 정체성. 언론계 원로들이 대중일보를 명실상부한 인천언론의 시초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 이유들이다.
대중일보는 지금의 인천 중구 신포동에 사옥을 마련했다. 창간호는 현재 일반적인 신문크기의 절반인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발행됐다. 이후 한 달 간 면수가 1~2개를 왔다갔다하다 창간 한 달 뒤인 11월9일(제34호)에야 2면 발행체제가 굳어졌다. 취재인력과 발행시설 등 당시 상황이 전반적으로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창간 2년째인 1947년, 사옥을 신포동에서 중구 중앙동 4가 8번지 옛 조선여행사 지사 건물로 옮긴다. 이후 1950년 1월1일자 신년호부터 타블로이드판에서 오늘날의 신문과 비슷한 배대판으로 바꾸게 된다.
대중일보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발행이 중단됐다. 대중일보의 시대가 4년 8개월 만에 막을 내린 것이다.


▲지역언론의 계보

창간 당시 대중일보는 해방 직후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좌파 또는 중도좌파적 성향을 띠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1945년 말 '인민공화국'을 부정한 미 군정청의 한국 통치가 본격화되면서 보수적 색채를 드러내게 된다.
이에 반발해 이듬해인 1946년 1월13일, 엄흥섭 편집국장을 비롯한 기자 7명이 사표를 던지고 나온다.
두 달 뒤 3월1일 중구 내동 74번지에서 '인천신문(仁川新聞)'을 창간한다. 해방 후 '인천신문'이란 제호의 첫 등장이다. 당시 인천신문은 짙은 좌파적 색채를 나타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인천신문은 4년 5개월의 세월을 접고 폐간한다.
한국전쟁 중 인천에선 또 다른 일간지가 탄생한다. 1952년 8월 1일 인천 중구 신포동 산 11번지에서 창간한 '인천일보(仁川日報)'다. 인천신문과 마찬가지로 인천에서 '인천일보'란 제호의 등장도 이 때가 처음이다. 함경도에서 인천으로 피난 온 재력가들이 힘을 합쳐 만든 신문이 당시 인천일보다.
인천일보는 1955년 2월10일 제호를 '경인일보(京仁日報)'로 바꿔 발행을 계속하다 1961년 5월 박정희 군사정권의 언론 탄압정책으로 자진 폐간한다.
대중일보는 변화를 거듭한다. 1950년 6월 신문 발행을 멈춘지 석달 만인 9월19일 종전 대중일보의 시설과 인원을 중심으로 '인천신보(仁川新報)'를 창간한다. 한국전쟁 와중 부산에 피난 가 발행을 계속하던 인천신보는 1953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신문을 만든다.
1957년 7월19일 인천신보는 '기호일보(畿湖日報)'로 이름을 바꾼다. 신문발행 지역을 인천에서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늘리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60년 7월7일 인천언론사의 한 획을 긋게 될 '경기매일신문(京畿每日新聞)'이 문을 연다. 경기매일신문은 1973년 8월 말까지 13년 간 발행된다. 경기매일신문은 인천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언론이었다.
1945년 10월7일 대중일보에서 시작된 인천의 언론사는 '대중일보→인천신보→기호일보→경기매일신문'이란 하나의 계보를 완성한다.
 

   
▲ 1960년 당시 경기매일신문사 사옥. 대중일보는 1950년 9월'인천신보', 1957년 7월'기호일보', 1960년 7월'경기매일신문'으로 사명을 바꿔가면서 인천에서 사세를 확장해갔다. /자료=인천언론사



▲대중일보를 비롯한 세 갈래 흐름

해방 후 인천 언론에는 크게 세 줄기 계보가 형성됐다. 가장 이르고 큰 줄기가 대중일보에서 경기매일신문으로 이어지는 흐름이고 두 번째가 바로 인천신문이다.
인천신문은 1960년 8월15일 기업인 허합 주도로 인천시 중구 사동 14번지에서 세상에 창간을 알렸다. 앞서 1946년 같은 이름으로 창간됐다 한국전쟁 발발로 폐간한 중구 내동의 과거 인천신문과 전혀 다른 신문이었다.
인천신문은 박정희 군사정권 치하 암흑기 속에 발행을 이어갔다. 계속되는 언론탄압에도 조간을 석간으로 바꿔가며 인천언론의 자존심을 지켜갔다.
1968년 8월15일 창간 8주년을 맞아 인천신문은 '경기연합일보(京畿聯合日報)'로 제호를 바꾸고 도약을 다짐한다. 과거 대중일보가 그랬듯 인천을 넘어 경기도 전체를 아우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 시도는 인천언론사에 큰 방점을 찍게 된다. 경기연합일보는 1969년 4월28일 인천을 떠나 본사를 경기도 수원시로 옮긴다. 인천 입장에선 신문사 하나를 잃게 된 것이다. 인천신문을 창간했던 허합 사장은 후에 무혐의 처분을 받게 된 수재의연금 횡령 누명을 쓰면서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 10월1일 경기연합일보는 '연합신문(聯合新聞)'으로 이름을 다시 바꾼다. 연합신문은 1973년 9월1일 경기신문(현 경인일보 전신)으로 제호를 바꿀 때까지 발행을 이어갔다.
이렇게 해서 인천 언론에는 대중일보와 별개로 '인천신문→경기연합일보→연합신문→경기신문'이란 흐름이 만들어진다.
인천언론의 세 번째 줄기는 '경기일보(京畿日報)'다. 대중일보가 경기매일신문이란 이름으로 한창 사세를 떨치고 허합의 인천신문이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1966년 2월22일 경기일보는 인천 중구 신포동 국제빌딩에서 창간한다.
경기일보는 1967년 2월 일요일판 발행(주 1회), 1969년 '경기교육' 발행, 1971년 어린이 신문 '소년경기' 창간 등 인천에 터를 잡고 발전을 거듭했다. 대중일보나 인천신문보다는 늦게 출발했지만 착실한 경영으로 1973년 8월 말까지 인천의 대표언론으로 자리잡았다. /노승환기자 berita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