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생각엔 행복한 죽음으로 본다.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고서 미리 준비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난 50여 회 동안 그려왔던 내 그림 그리기를 이렇게 마감할 수 있어서 난 좋다. 이젠, 이 소설의 끝남과 함께 나도 죽어야겠다."탱고"와 함께 멋지게 죽는 씬을 연기하면서 폼나는 즐거움을 누려야겠다(쉬어야겠다). 2011 김충순, 켄트지 21X29㎝, 볼펜, 수채.

다다는 소설을 읽고난 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다다가 초이에게서 받은 프린트물 맨 첫장에는 분명히 [소설]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것을 다 읽고난 후 다다는 그것이 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유언]이라고 생각했다. 그속에는 한 인간이 어떻게 사랑을 하고 죽게 되었는지가 쓰여 있었다. 그것은 삶의 기록이었지만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기록이기도 했다.

다다는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것을 느꼈다. 그것이 소설이었다면 이렇게 무기력한 증상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이 아니었고 박부장이 죽기 직전까지 피로 쓴 마지막 유서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이다.

그는 정말 까마득하게 몰랐다. 박부장이 탱고를 추었다니! 그래서 이 먼 곳, 아르헨티나 지사로 자원해서 오게 되었고,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탱고와 함께 보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눈물이 나왔다. 그 옆을 지켜준 여인이 초이였다. 그는 초이가 마녀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을 유혹하고 자신에게서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박부장과 자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남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나쁜 마녀라고 생각했는데, 초이는 박부장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지켜준 유일한 여인이었다.

다다는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프린트물을 읽어서 피곤했고, 무엇보다 그 속에 들어있던 내용의 충격적 사실 때문에 어지러웠다. 그는 눈을 감고 오랫동안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머리 속에서는 박부장이 쓴 그 글들이 하나하나 되새김되고 있었다. 누워있던 활자들이 벌떡 일어나 다다의 머리속을 어지럽게 걸어다녔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해보기도 했지만 되지 않았다.

다다는 그렇게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마트로 갔다. 마트의 계산대에 앉아있는 여종업원은 낯이 익은 여자였다. 인디오 계열의 피가 섞였는데, 영화 [프라다]의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셀마 헤이젝과 비슷한 생김새의 미녀였다. 다다가 카드만을 들고와서 계산하려고 하자, 여권을 달라고 요구했었다. 결국 집에까지 다시 되돌아가서 여권을 들고와 물건을 샀었는데 그때는 기분이 안좋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10달러 정도의 물건을 살 경우에도 반드시 신분증을 요구했다. 가르시아의 말로는 위조지폐도 많고 위조 신분증도 많아서 금융사고가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종업원 역시 다다를 알아보았다. 그는 낄메스 레드를 두 병 샀다. 그리고 안주감으로 메론과 견과류가 모아져 있는 통을 하나 샀다. 집으로 돌아와 1리터가 들어있는 커다란 맥주 두 병을 다 마셨다. 취기가 조금 오르자 초이가 보고 싶어졌다. 왜 초이는 약속장소에 직접 나타나지 않고 심부름꾼을 보내 이 소설을 나에게 전달한 것일까? 하지만 그가 초이를 만날 방법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소설이 들어있던 봉투를 다시 훑어보았다. 봉투 속에는 두꺼운 원고뭉치의 소설말고도 한 장짜리 편지가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소설을 꺼내느라고 한 장으로 된 종이가 또 들어있다는 것을 미쳐 보지 못했었다.



이유서를 읽고난 후
반드시 태워주세요.



한글로 프린트된 인쇄체 글씨였지만 다다는 그 글을 쓴 사람이 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생각해보니까 이 소설은 매우 위험한 문건이었다. 만약 보험회사 직원에게 이 소설이 넘어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겉에는 소설이라고 쓰여 있지만 박부장의 보험금 지급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소설 속 내용대로 보험금 수령자는 초이일 것이다.

다다는 욕실로 가서 욕조 바닥에 두꺼운 종이를 깔았다. 방안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각종 봉튜들, 주로 음식을 사거나 백화점에서 물건을 샀을 때 받은 종이봉투들이었지만 그것들을 넓게 펴서 바닥에 깔아놓았다. 그리고 박부장이 쓴 소설을 몇장씩 찢어서 불을 붙였다. 그것들은 다다의 라이터 끝에서 활활 타오르다가 검은 재로 변해서 힘없이 욕조바닥에 깔아둔 종이봉투들 위로 떨어졌다. 박부장의 원고가 꽤 길었기 때문에 모두 검은 재로 만드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다다는 다시 욕조 바닥의 종이봉투들을 조심스럽게 모아서 여러겹으로 접은 뒤 비닐봉지에 넣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과정에서 검게 탄 재가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래서 샤워기를 들고 욕조바닥을 청소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다는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박부장이 쓴 소설들이 머리 속에 박혀서 빠져나오지를 않았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자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정리였다.
박부장에게 탱고는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순간에 탱고는 박부장을 살아 숨쉬게 했던 유일한 힘이었다. 그는 몸이 나빠지면서도 초이와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 변두리의 탱고바를 전전하며 탱고를 췄다. 이름없는 동네의 탱고바에는 주로 노인들이 많이 온다. 아니면 이제 막 탱고를 배우기 시작한 초짜들이 감히 다운타운의 일급 탱고바에는 진출하지 못하고 밀롱가 데뷔전을 치르며 실전경험을 쌓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초이와 탱고를 추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한국에서 온 전화는 아니었다. 국제로밍된 전화는 알 수없는 긴 숫자들이 번호 앞에 뜨지만 이 전화는 부에노스 시내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다다는 한국말로 전화를 받았다. 부에노스에서 걸려온 전화였지만 자신에게 전화를 걸 사람은 가르시아거나……아, 그 순간 다다는 몸이 굳었다. 초이일 것이다. 이런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다시 한 번 물어보았지만 수회기 저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역시 초이였다.
"다 읽어보셨어요?"
다다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태우셨나요?"
"응"
"욕조에서요?"
"응"
"만날까요?"

다다는 초이의 말에 짧게 대답만 했다. 초이는 다다가 전혀 알 수 없는 주소를 불러주었다. 택시를 타고 이 주소를 보이면 택시기사가 데려다 줄 것이라고 했다. 조금 멀기 때문에 다다가 머물고 있는 프렌치 이 아우스트리아에서는 아마 20달러 정도가 나올 것이라는 말도 해주었다.
다다는 옷을 입고 곧바로 집밖으로 나왔다.






※소설 탱고는 다음주 15일 52회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