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8월31일 인천언론 무슨 일이 있었나


 

   
▲ 1970년대 초반 인천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경기매일신문 송수안 사장(오른쪽). 박 대통령은 송 사장에 국가 훈장을 수여했으나 그 후 경기매일신문을 강제 통합시켜 인천 지역의 언론을 말살시켰다.

1973년 8월31일 오후 6시. 송수안 '경기매일신문' 발행인과 김형희 편집국장은 인하공사(중앙정보부 인천분실) 지하실로 연행됐다. 지하조사실의 강렬한 백열등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칠순이 넘은 송 발행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됐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입가에 경련마저 일었다. 밤 11시 30분. 둔탁한 신발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쾅!"하고 문이 열리더니 "빨리 찍어!"란 목소리가 귀를 찢었다. 송 발행인과 김 국장이 서류를 훑어보았다. '3사 통합에 찬성한다'는 내용과 '9월1일부터는 경기매일신문을 발행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였다. "못하겠소." 송 사장이 입을 열자마자 군홧발이 김 국장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어디, 때릴 테면 때려봐라' 김 국장이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자 발과 주먹이 마구 날아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송 사장은 결국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김 국장에게도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이후 1988년 인천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 인천은 '언론의 불모지'란 오명 아래 15년 동안 '언론암흑기'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 기간 인천사람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었다.
지난 8월31일은 인천의 향토언론이자 대표언론인 '경기매일신문'이 지령 '제 9018호'를 끝으로 폐간된 지 38주년이 되는 날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의해 강제 폐간된 '경기매일신문'은 당시 인천시 중구 중앙동에 본사를 둔 인천의 대표 언론이었다. 이 신문은 광복 이후 인천지역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인 '대중일보'의 후신이었다.
'경기매일신문'은 1946년 인천 최초의 일간신문인 '대중일보'란 이름으로 창간했다가 1950년 6·25전쟁으로 발행을 중단한다. 이후 '인천신보'로 재편한 뒤 1960년 '경기매일신문'으로 다시 제호를 바꾸었다. 1973년 대공분실에 끌려간 송수안 '경기매일신문' 발행인은 '대중일보'의 부사장이었다.
당시 편집국장이던 김형희는 2003년 인천언론인클럽이 발행하는 '인천언론회보'에 "무법 앞에 자폭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이 아직도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며 "열심히 죽음의 날을 준비했던 동료들의 처절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분신이라도 했다면 편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1950년대 초 인천신보에 견학 온 초등학교 학생들. 대중일보 사옥에서 제호만 바꾸어 발행했다.(지금의 중구 중앙동 4가 8번지)


▲왜 연합신문으로 통합됐나

 

   
▲ 1963년 8월 경기매일신문 구독 영수증. 당시 인천 지역에서 부수, 지령(紙齡), 최신식 윤전기, 7층 사옥 등을 자랑한 최대 신문사였다.

당시 인천에선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가 발행되고 있었다. 이 두 신문은 군사정권의 '1도1사 원칙'에 따라 수원에 있던 '연합신문'에 강제 합병된다. 문제는 당시 경기 언론의 상황은 시설기준, 발행부수, 발행연조에 있어서 '경기매일신문'이 단연 으뜸이었는데도 왜 '경기매일신문'으로 통합되지 않고 '연합신문'으로 통합됐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형희 전 국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당시 홍 모 '연합신문' 사장과 오 모 중앙정보부 경기분실장(인하공사 사장), 이 모 무임소장관이 인천·경기 지역 언론 통폐합의 주역이었다. 1973년 4월 중순 공보부의 조사 결과 '경기매일신문'이 역사, 발행부수, 시설면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사실을 신문사에 보내왔었다. 따라서 통합된다면 '경기매일신문'이 중심이 될 것이란 자부심이 있었다. 확고한 이유를 알고 있지만 필자는 발표를 유보하겠다. 개인적인 불화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천이 뒤로 밀리도록 뭔가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얘기다.
1966년 창간, 지령 '제 2334호'를 끝으로 '연합신문'에 강제 합병된 '경기일보' 역시 서슬 퍼런 군사독재의 철퇴에 무기력하게 무너져야 했다. 인천언론인클럽이 발행한 '인천언론사'는 '경기일보' 곽인주 사장은 통폐합되기 며칠 전, 비장한 모습으로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개인 전화까지 모두가 감시 도청당하는 마당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비통해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비위를 거스른 펜은 무참히 꺾였고, 야밤에 연행돼 온갖 고초와 협박을 당했다. 멀쩡했던 기업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유신시대'였던 것이다.
통폐합되기 한 달 전인 1973년 7월31일 인천올림포스 호텔에서 경기도 '3사 통합대회'가 열렸다. 3사 통합대회였지만 이 행사를 다룬 신문은 수원에 본사를 둔 '연합신문' 단 하나뿐이었다.
이 신문은 8월1일자로 '도내 3사 신문사 통합, 제호는 경기신문으로 발족, 본사 소재지 수원, 9월 1일 창간, 설립 자본금 5천만 원'이라는 내용을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또 발표문 등을 통해 잔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반면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 8월1일자는 합의에 따른 '통합성명서'만을 아무 설명 없이 게재하고 전날 열린 3사 통합대회에 대해선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 대중일보의 제호. 발행지를'인천시 중앙동'으로 명기하고 있다.

▲경기매일신문 폐간 앞두고 9,000호 특집

'경기매일신문'은 3사 통합대회가 열린 19일 뒤인 8월10일 지령 9,000호를 맞아 특집호를 제작한다. 특집호는 그동안 경기매일신문이 걸어온 길을 조명하고, 통합의 아픔을 행간에 담은 언론인 조수일의 '9천 층의 바벨탑-불의를 바로 하자고 계도했다는 이야기가 갈피마다 새겨져'를 실었다.
또 '만화로 본 9000호'를 두 커트를 싣고 7면 '와장창'이란 고정만화에도 9,000호를 그렸다. 사설은 '애환 얼룩진 금자탑-본보 9,000호를 내놓으면서'를 통해 그동안 걸어온 과정과 통합의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등 축하해야 할 9,000호는 장례식 분위기로 제작됐다.



▲인천언론의 암흑기였던 1973~1988년

언론을 잃어버린 인천사람들은 '신문 불매운동'까지 벌이며 3사 통합에 저항한다. 인천문화재단이 기록한 '2010 인천문화예술사 인물 인터뷰'에서 경기매일신문 부국장을 지낸 오종원 씨는 "언론통폐합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신문이 없어지면서 저 역시 실직자로 전락했지요. 궁여지책 끝에 저는 인천상공회의소에 들어갔는데 인천상의보를 통해 언론의 맥을 끊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인천에서는 인천상의보가 유일한 언론이자 인천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경제와 문화기사에 치중해야 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사무실에 주재하면서 감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경기매일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김상봉 씨도 1978년부터 '기서문화'란 잡지를 만든다. 인천의 언론인들은 이처럼 신문이 없던 시대를 여러 형태의 잡지로 대신하면서 울분을 달래야 했다.

 

   
▲ 인천시 중앙동 소재의 인천일보 구사옥(현 대한통운 자리). 6·29 선언 이후 인천언론의 맥을 잇기 위해 일부러'대중일보'인근인 이곳에서 인천일보 창간호를 발행했다.



▲인천일보 창간 … 인천의 한을 풀다

"촛불 하나 없었던 곳에 등불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김상봉 원로 언론인, 인천문화재단 2010 인천문화예술사 인물 인터뷰)
1988년 '인천신문'(현 인천일보)의 창간은 인천사람들에겐 믿을 수 없는 행복이고 기쁨이었다.
국민들의 6월항쟁 결과인 '언론자율화'가 발표된 1987년 11월19일 인천지역 법인을 포함한 15명의 인천주주들이 '인천신문사 발기위원회'를 구성하고, 자본금 7억5천653만 원을 확정한다. 군사정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경기도에 있던 3사 통합신문에 투자를 했던 인천의 주주들이 '이제 내고장 신문을 만들자'면 전격 의기투합한 것이다. <인천언론사>(인천언론인클럽 발행)는 이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천신문이 마침내 1988년 7월15일 창간호를 발행, 인천 언론공백 15년의 긴 암흑 터널을 뚫고 횃불을 높이 들어올렸다. 실로 '인천인'들에게는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인천신문 창간엔 이기성, 이기상, 심정구, 문병하 씨와 같은 지역유지와 오종원, 오광철, 김창수, 이재호, 최용표, 정종웅 씨 등 '경기매일신문' 관계자들을 비롯한 인천의 언론인들이 대거 합류했다. 이들은 대중일보 때부터 인천에서 사업, 언론인을 하던 사람들로 '인천신문'이 창간하자 '대중일보', '경기매일신문'의 맥을 되살리자며 내 고장 언론에 뛰어든 것이다.
경기매일신문 폐간 38주년을 맞은 지금, 인천의 뜻있는 사람들은 인천일보가 '경기매일신문'과 '대중일보'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만큼 대표언론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우성 본보 객원논설위원은 "대중일보와 경기매일신문에서 일하던 언론인들의 정신은 인천일보가 1988년 창간할 당시 그대로 이어졌다"며 "언론통폐합 38주년을 맞은 지금 인천일보는 대중일보, 경기매일신문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매일신문 부국장을 지낸 인천언론인 1세대인 오종원 전 인천일보 논설위원은 "인천일보는 인천의 정통언론인들이 다시 뭉쳐서 만든 신문"이라며 "인천일보 창간은 대중일보와 경기매일신문 복간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 대중일보 이후 인천언론의 흐름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사진제공=조우성 본보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