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이…. 밀롱가 땅게로, 저 연놈들은 어쩌자고 저리 밤이면 밤마다 날밤을 까면서 뺑뺑이만 도는지…. 소설 쓰는 작자가 힘이 넘치는 걸까? 그림 그리는 난 정신이 없는데. 가까운 시일에 다시 만나서 뭐 다른 재미있는 것을 좀 부탁하고 싶다. 하하 술 한잔하자는 생각은 기본으로 깔아두고서…. 켄트지 210X290㎜ / 볼펜, 수채, 2011그림 김충순

검은 나뭇가지 위에서 수 천 개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붉은색, 초록색, 파란색, 흰색, 노란색. 부처님 오신 날 대웅전 법당 앞에 걸리는 수 천 개의 연등처럼, 밀롱가 바닥을 미끄러지는 다다의 스텝 하나 하나마다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라우라의 등에 오른손을 얹고, 니은자로 꺾여진 왼손으로는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고, 다다는 사람들로 꽉 찬 플로어에서 탱고를 추었다. 그의 얼굴 오른쪽에 라우라의 얼굴이 있었다. 라우라의 표정에는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다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발을 내딛는 곳마다 폭죽 터지는 것처럼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진행되는 밀롱가에서는 앞 커플을 추월하지 않는게 불문율이다. 토요일 밤처럼 사람들로 넘쳐나는 밀롱가에서 앞 뒤의 커플과 서로 스치지 않고 춤을 춘다는 것은 오랜 기간의 숙력된 노하우가 필요하다. 다양한 동작을 하다 보면 앞에서 멈칫거리는 커플이나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커플들과 스치거나 심지어 몸이 부딪칠 때도 있다. 그것은 탱고를 출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다. 리드를 하는 땅게로는 자신은 물론 같이 홀딩한 땅게라가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밀롱가의 빈 공안을 확보하며 춤을 춰야 한다.

다다는 밀롱가에 빼곡하게 채워진 사람들로부터 라우라를 보호하면서 한 걸음씩 내딛었다. 탱고 음악은 대부분 3분 이내에 끝난다. 하지만 그 3분속에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다. 인생에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에서부터 비극적인 탄식에 이르기까지, 그 짧은 3분안에 밀집되어 있는 것이다.

밀롱가에서의 탱고 딴다는 보통 4곡의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곡 한 곡 모두 드라마틱한 리듬을 갖고 있지만, 한 명의 땅게라와 춤을 출 때, 그 4곡을 어떻게 각각 다르게 춰야 할 것인가도 리드를 하는 땅게로는 생각한다. 첫 곡에서 조용한 탐색전 속에 드라마틱한 인생의 굴곡을 슬쩍 느꼈다면, 두 번째 곡에서는 조금 더 과감하게 상대의 영역으로 침입해 들어가 적극적인 결합을 시도한다. 상대의 다리 사이로 깊숙이 다리가 들어가는 간초나, 상대의 영역으로 발과 상체를 이동해서 그 영역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까다같은 공격적인 영토 침략이 시작된다.

"한국에 가서 탱고만 추었어요? 처음 부에노스에 왔을 때와는 너무나 달라요."

"괜찮아요?"

"딴 남자와 추는 것 같아. 그 짧은 시간에 어쩜 이렇게 좋아질 수 있죠?"

두 번째 곡이 끝났을 때 라우라는 다다의 춤이 좋아졌다고 칭찬을 했다. 그러나 사실 라우라와 홀딩한 뒤 몇 발자국 옮기지 않았을 때 이미 다다는 라우라의 그런 마음을 읽었다. 탱고는 두 사람의 몸과 몸이 밀착되면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전달이 된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라우라가 지금 다다의 리드에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다는 마지막 네 번째 곡에서 그동안 익혔던 필살기를 모두 쏟아부었다. 이제 리드에 대한 완벽한 자신감으로, 서둘지 않고 부드럽게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한 스텝 한 스텝 라우라를 가슴에 안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탱고 멜로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라우라를 적극적으로 리드하며 그동안 서울 충무로의 아트탱고 스튜디오에서 배웠던 필살기들을 적절한 타이밍을 찾아 풀어놓기 시작했다. 확실히 라우라를 보지 않은 지난 100일동안 자신의 탱고가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드디어 탱고 한 딴다가 모두 끝나고 꼬르띠나가 흘러나왔다. 플로어에 있는 모든 커플들이 홀딩을 풀고 각각 자리로 돌아갔다. 플로어는 텅 빈 네모난 공간으로 변했다. 객석에서는 갑자기 수많은 대화가 넘쳐나면서 그 모든 소리들이 뒤엉켜서 왁자지껄했다. 라우라는 다다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돌아오면서 다다의 손을 꼭 쥐었다. 3분의 탱고 음악 4곡이니까 불과 12분 정도 같이 춤을 추었을 뿐인데, 탱고를 추기 이전과 이후는 너무나 달랐다. 천국의 가장 높은 곳에서 지옥의 가장 낮은 곳까지 탱고의 드라마틱한 멜로디를 따라 여행하면서 두 사람은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모두 함께한 것이다.다다는 라우라와 가슴 저 깊은 밑바닥에서 함께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잘 추는데요? 서울 다녀오면 모두 이렇게 탱고를 잘 추게 되나? 이거 거꾸로 된 거 아닌가? 전세계 모든 땅게로스들이 탱고를 배우기 위해서 부에노스로 오는데, 부에노스에서 처음 탱고를 배운 다다형이, 서울에 가서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해서 올 줄이야 누가 상상했겠어요."

가르시아의 말을 듣고 다다는 가르시아의 어깨를 슬쩍 치면서 그냥 웃었다. 하지만 음악을 매개로 두 사람이 함께 교류하며 움직이는 탱고의 기본 원리를 이해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혼자서도 설 수 있는 자신만의 무게중심을 잡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같이 인생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서로에게 무작정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게중심은 확실하게 잡으면서 자신의 자아를 갖고 상대와 만나는 것이 진정한 동반자의 자세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탱고는 그렇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지만, 그 속에는 각자의 뚜렷한 자아를 갖고 그것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숨어 있다. 나만을 고집해서는 상대와 충돌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나를 포기하면 탱고를 추는 순간 상대만 존재하고 나의 자아는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두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양보와 타협이 필요하다.

모든 일이 끝나가는 파장 분위기는 어디서나 비슷하다. 밀롱가가 끝날 무렵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던 플로어도 썰렁해지고 사람들의 긴장도 풀어지면서 훨씬 더 자유스럽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제 나갈 시간이다. 다다와 가르시아, 그리고 라우라는 밖으로 나왔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그들을 사로잡았다.
"한잔 할까?"

다다는 가르시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사실은 라우라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눈치 백단인 가르시아가 그런 다다의 마음을 모를리 없다.

"난 할 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니까 지금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누나는 다다형과 한잔 하고 들어오지 그래?"

가르시아는 라우라를 보지도 않고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길에 서서 다다와 라우라는 그런 가르시아를 바라보았다. 가르시아는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제 다다와 라우라만 남았다. 새벽 4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