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 유물이 어디에 얼마나 …'실태 파악조차 못해
'수탈 유물이 어디에 얼마나 …'실태 파악조차 못해
  • 심영주
  • 승인 201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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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유출 문화재 이대로 좋은가


프랑스에 뺏겼던 우리 문화유산 외규장각 도서가 지난 14일 145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날 1차로 반환된 도서 75권은 조선시대 왕실의 생활상을 꼼꼼히 기록한 의궤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도서들이다. 궁궐 안에 건립한 규장각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할 목적과 안전하다는 국방상의 이유로 1781년 강화도에 세워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자료들이다. 그러나 근대 역사에서 군사적 요충지였던 인천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벌이는 전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인명·재산피해는 물론, 외규장각 도서처럼 가치가 높은 문화재들을 대거 수탈당했다.

 

   
▲ 19세기 고지도에 나타난 외규장각(오른쪽 두번째 건물) 전경. 프랑스 군은 이 건물을 불태우고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도서, 은괴, 지도, 족자, 대리석 함 등을 약탈해 갔다가 이번에 대여 형식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강화가 아닌 곳을 보관 장소로 지정하는 등 사리에 맞지 않는 행태를 보여 빈축을 사고 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지도)


▲강대국들의 한반도 진출로였던 인천

흔히 인천을 '전쟁의 도시'라고 한다. 전쟁을 직접 주도하진 않았지만 서울과 가까운 데다 바다를 옆에 두고 있어 한반도를 점령하려는 세력들에게 전략지로 꼽히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사에서 인천은 서구열강들의 전쟁 놀이터와 다름없었다.

1866년 프랑스는 조선의 천주교도 탄압을 빌미로 강화도에 침범한 '병인양요'를 일으킨다.

1871년엔 조선을 개항시키려는 미국의 무력 침략, '신미양요'가 강화도에서 벌어졌다. 1875년에도 일본 제국주의 대륙침략의 신호탄이었던 '운요호 사건'이 발생한다. 조선해안을 연구한다는 핑계로 강화도에 접근한 일본은 조선수군이 자신들을 공격했다며 영종도에 상륙해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돌아갔다.

1904년엔 러일전쟁이 발발해 러시아와 일본이 정작 자신들의 나라가 아닌 제물포 앞바다에서 싸우기도 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 3천여 명은 제물포로 상륙해 서울을 점령했다.

 

   
▲ 콜로라도 함상의 수자기(帥字旗).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노획하여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던 군기이다. 이 기는 2007년 10월 임대 형식으로 돌아와 현재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이나 완전한 반환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강화군 발행. 신미양요 기록사진집 사진)

▲수탈된 인천 문화재 얼마나 되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번에 환수된 외규장각 도서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는 1천7종, 5천67권이 소장돼 있던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의궤와 고문서 340여권을 약탈해 갔다. 이때 은괴 19상자(19만7천200프랑가치, 2008년기준)와 지도 2개, 족자 7점, 옥책, 갑옷, 투구 등 많은 유산들도 함께 가져갔다. 특히 은괴의 경우 단순히 돈의 가치일 뿐 아니라 당시 은괴를 만드는 양식과 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여서 반환이 시급하다.

신미양요 땐 광성진 전투에서 어재현 장군의 수자기(帥字旗)를 포함해 200여점의 유물을 뺏겼다. 깃발 중앙에 수(帥)라고 적혀있는 넓이 12폭의 수자기는 조선시대 각 군영이 훈련을 할 때 지휘권의 상징으로 내걸던 삼베로 만든 장수의 깃발이다. 수자기는 지난 2007년 임대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와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지만 다른 약탈품들은 아직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운요호 사건 땐 칼, 창, 군복, 병서, 악기, 호적, 대포 등이 수탈됐다. 이 중 호적은 국립동경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추정되며 대포 36문을 비롯한 군사 전리품들은 1933년 일본이 출판한 '인천부사'(仁川府史)의 기록에 따라 야스쿠니 신사의 유취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실태 파악 안돼

이 외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각각의 나라들이 전리품들을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인천시는 현재 어떤 유물들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외규장각 도서는 지난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베르사유 별관 파손 창고에서 처음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다른 나라에 있는 유물들도 옛 서적을 보거나 관련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추측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 고려궁지에 복원한 외규장각 전경.


뿔뿔이 흩어져 있는 수탈 문화재를 연구하고 체계적으로 정립한 자료도 없을 뿐 아니라 연구에 대한 시의 의지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 관계자는 "전쟁이라는 워낙 혼란했던 시기라 당시 기록이 별로 없다"며 "또 연구를 하려고 해도 예산이나 인력의 부족으로 현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인천시립박물관 관계자 역시 "그동안 현지 실사를 통한 인천유출 문화재 실태파악의 필요성이 강조됐지만 시 재정상의 이유로 번번이 취소됐다"며 "올해에도 일본 현장조사를 추진했지만 성사가 안 됐다"고 말했다.
현재 해외에 있는 문화재를 조사한 자료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비공식 자료가 유일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해외에 유출된 한국문화재는 20개국 14만5천여점으로 집계되고 있다. 하지만 이 수치는 약탈된 물건들과 불법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모두 합친 것이라 명확한 자료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우리의 유물을 가진 나라들이 기록을 지워버리면 어떤 유물이 어디에 보관됐었는지 존재조차 모를 수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심영주기자 yjshim@i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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