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택씨는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휴지를 뽑았다. 정동준 계장은 너무 안타까워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운 뒤 잔을 넘겼다.

 『자, 제 술 한 잔 받으시지요?』

 『내, 이거, 자식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닌 줄 압니다만 한 가지만 여쭈어 봅시다….』

 그러면서 오경택씨는 평안북도 구성시와 대관군 사이에 있던 자신의 고향집이야기를 꺼냈다. 인구는 말없이 오경택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현재 자신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은혜읍이 바로 오경택씨의 고향이었구나 하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스물 한 살 때입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던 시절인데 마을 치안대에서 자꾸 저를 부르러 왔어요. 함께 마을의 치안을 바로 잡자고 하면서요. 그래서 도리없이 이웃에 사는 형님들과 같이 치안대에 가담해 내 고향과 부모형제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올 때 북한지역의 정세가 뒤바뀌어 얘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모와 삼촌들을 그대로 둔 채 국군과 함께 남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겠지요. 중공군의 개입과 함께 북한지역 정세가 180도로 바뀌면서 치안대 가담자들의 생명은 경각에 달했으니까요.』

 『아무튼 그런 연유로 부모와 헤어져 천애고아로 살고 있는데 거기 살던 원주민들은 어디로 쫓겨갔을 것 같습니까?』

 『최근 북한을 내왕하는 중국 거주 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월남자 가족들은 대부분 양강도나 함경북도 내륙 쪽에 정착촌을 만들어 그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경택씨는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양강도나 함경북도 내륙 쪽이라면 6·25 당시 어디쯤을 말합니까?』

 『자강도(慈江道)는 해방 전 평안북도 강계·자성·후창·위원·초산·희천군 등 인근 8개 군을 떼어내어 1949년에 신설한 도(道)니까 오선생님 같은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양강도(兩江道)는 과거 함경남도 산악지대의 혜산시와 인근 운흥·갑산·삼수·부전군과 함경북도의 백암·무산군 등을 떼어내어 만든 신설된 도인데, 내륙지역이라면 양강도 삼수·갑산·백암군과 함경북도의 연사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강제 이주시켜 몽지리 총살시키지는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그럼요. 그쪽 정권에 정면으로 대든 사람들은 정권유지를 위해 총살형 같은 극형으로 다스렸지만 그외 성분 불량자들은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부터는 전후복구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곧바로 포용정책을 실시하면서 전쟁포로와 월남자 가족들도 일정 수준까지는 껴안기 시작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