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초승달 지역을 따라서'(3)'왕의 대로'는 소망한다, 인류 공동의 풍요로움을


요르단은 성경의 땅이다. 아브라함, 소돔과 고모라, 모세의 출애굽 등의 구약 뿐 아니라 예수님의 세례지, 요한과 바울의 세례운동과 사역 등 신약의 역사무대도 요르단과 관계가 깊다. 또한 성서에 나타난 고대 왕국인 암몬, 아모리, 모압, 에돔도 요르단이다. 암몬은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을 중심으로 있었던 왕국이고, 이어서 남쪽으로 아르논 골짜기 주변의 아모리 왕국, 아르논 강부터 세렛 강 지역의 모압 왕국, 그리고 홍해와 맞닿은 아카바, 페트라 및 와디럼 주변이 에돔 왕국이었다. 고대로부터 이러한 왕국들을 연결하는 길이 있었을 터, 그 길을 '왕의 대로(King's Highway)'라고 하였다.
왕의 대로는 홍해의 아카바 항에서 페트라와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을 거쳐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펴기 위해 건설했는데 시리아, 히타이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여러 제국들의 군대도 이 대로를 통해 움직였다. 또한 모세가 애굽 땅인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에돔 왕에게 이 지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요청한 길이기도 하다.
 

   
▲ '왕의 대로'는 홍해의 아카바 항에서 페트라와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을 거쳐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펴기 위해 건설했는데 시리아, 히타이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여러 제국들의 군대도 이 대로를 통해 움직였다. 또한 모세가 애굽 땅인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에돔 왕에게 이 지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요청한 길이기도 하다. 이후 십자군의 진군로로 사용되기도 했다.



"청컨대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나 통과하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민수기, 20장 17절-


왕의 대로가 고원임에도 불구하고 차 안의 온도는 내려갈 줄 모른다. 거센 바람이 열기를 식혀줄 것 같지만 태양은 더욱 강렬한 햇살을 내리 꽂는다. 황무지 벌판 꼭대기, 좌우로 거침없이 너른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사이로 왕의 대로가 구불구불 뱀처럼 이어져 있다. 수천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간 길이기에 그보다 더 많은 흔적이 배어있다. 그래서인가. 보이는 것 모두가 역사다. 그것도 정오의 햇살처럼 촘촘하다. 아니 겹겹이 쌓여 흘러넘친다.
모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에돔 왕의 반대로 이 길을 가지 못하고 우회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대로를 차지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황금시대라 할 수 있는 솔로몬 시대의 번성도 왕의 대로를 오가는 무역상들의 통행세 수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왕의 대로는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대상(隊商)들이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국제무역로로 발전했다. 보다 나은 삶을 살고픈 인류 공동의 생각과 실천이 어김없이 왕의 대로 위에서도 펼쳐졌던 것이다. 그런데 하이에나 같은 왕국과 제국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그 길목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뿐, 그들은 대로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없었다.
11세기 말. 왕의 대로는 또 한 번 소용돌이친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인들로부터 탈환한다는 미명 아래 십자군전쟁을 일으킨다. 십자군전쟁은 2세기 동안 여덟 번에 걸쳐 벌어졌다. 이로 인해 왕의 대로는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의 피로 물들었다. 그것은 왕의 대로가 생긴 이후 최고로 참혹한 시기였다.

 

   
▲ 모압족의 수요였던 길하레셋의 성이다. 길하레셋은 아르논 남쪽 28.4㎞, 사해동쪽 17.6㎞지점에 있는 고대 모압의 수도로 오늘날의 카락성이다. 해발 933m 고원에 위치한 이곳은 주변의 언덕과 깊은 계곡들로 인해 천연 요새를 이루고 있다. 왕의 대로의 핵심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성지탈환은 그럴듯한 명분에 불과했다. 기사로 대변되는 봉건영주들은 영토 확장에 목메었고, 상인들은 왕의 대로를 차지함으로써 상업적 이익을 노렸다. 농민들에게는 봉건사회의 폭압에서 벗어나는 창구가 되었다.
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십자군전쟁에 나서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단지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그동안 지은 죄가 용서된다는 마력에 있었다. 이리하여 저마다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종교적 신앙심은 처음부터 없었다. 호기심과 모험심만 가득했고 그것은 무조건적 약탈과 살인으로 발전했다. 전쟁터인 왕의 대로는 광분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그러나 광분은 필망(必亡)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그러하매 다분히 정치적이고 식민지적 영토 확장을 노린 십자군전쟁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왕의 대로는 건재하다. 영광과 오욕의 역사는 모두 대로 옆에 나지막이 엎드려 있다. 대로만이 역사의 승리자가 되어 오늘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는 왕의 대로도 족장의 길도 술탄의 길로도 불리길 거부한다. 그러한 이름 위에서 행해진 지난 시간이 진저리가 나기 때문이다.
이제 대로는 인류의 풍요로운 삶과 문화를 향유시키는 전령사로서의 길, 동-서, 남-북을 아우르며 함께 행복으로 나아가는 풍요의 길로 불리길 바란다. 그것은 누가 해야 하는가. 오직 지구촌의 인류가 해야 할 일이다. 길은 다만 역사를 반추하며 오늘도 미어지는 마음을 누르고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 카스르 알할라밧(Qasr al-Hallabat)은 원래 로마군의 주둔지였다. 연대병력이 주둔한 성채였지만 이후 이슬람왕조인 우마이야드 왕조가 점령한 후 별궁으로 바꾸었다. 현재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십자군 전쟁의 내막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부터 2세기에 걸쳐 기독교인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인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이다. 십자군이라 부른 것은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종교전쟁이지만, 내면에는 각기 다른 야심이 반영된 전쟁이다.
최초의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 의해 제창되었다. 1095년 11월 27일, 그는 성전(聖戰)을 촉구하며 종군하는 군사들은 신이 구원해 준다고 약속했다. 이에 십자군은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했다. 광분적인 신앙과 이교도에 대한 증오심이 십자군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으로 미화되었다.
1회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인들이 성공했다. 그것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십자군전쟁은 이슬람의 반격이었다. 십자군은 충분하지 못한 전력에 계층 상호간의 분쟁으로 실패했다. 교황의 권한강화 야욕, 봉건영주들의 영토 확장, 상인들의 경제적 이득 챙기기에 성전은 뒷전이었다.
교황권의 강화를 위해 제창된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 교황권의 약화를 가져왔고, 오히려 귀족과 영주들의 영토가 왕의 영지로 편입됨으로서 왕권의 강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최대의 이익을 얻은 것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이었다. 상업이 발달했던 이들 도시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그리고 중세 유럽을 변혁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슬람교도는 그들의 영웅 살라딘이 직접 행했듯이 관용의 정신이 강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그렇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만 명의 무슬림과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렇게 십자군에 의해 자행된 만행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하지만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를 더 낱낱이 밝혔다. 그러자 교황은 십자군이 저지른 학살과 만행을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무려 900년의 세월이 지난 서기 2천년이었다.

 

 

 

 

 

 

   
 


요르단=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조태현·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