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초승달 지역'을 따라서왕의 대로 위에 꽃핀 문명 요르단'(2) 요르단, 중동의 중재자


전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 기독교와 아랍세계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요르단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이들 국가와 인접해 있어 자연스럽게 완충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역할은 요르단의 대외정책에 잘 나타나 있다. 온건아랍세력의 대변자로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대표적인 아랍 국가로 친미, 친서방 정책과 함께 주변 아랍국가와의 관계도 중시하는 균형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현재 집권하고 있는 압둘라2세 국왕은 외교활동 목표로 ▲중동평화협상 핵심 중재자로서의 지속적인 역할 유지 ▲미국 및 유럽과의 우호협력 관계 유지 ▲경제를 중심으로 아시아권과의 새로운협력 관계 모색 ▲이슬람 서방 간 대립 해소를 위한 '온건 이슬람 운동' 추진 ▲아랍 및 범이슬람권과의 기존 협력 관계 강화 등을 꼽고 있다. 중동과 함께 세계의 화약고인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롤모델로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 암만성 아래에 위치한 원형극장은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다.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중동의 전략적 요충지 요르단

 

   
 

이 같은 중재자적 입장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닌 요르단의 오랜 전쟁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요르단은 중동에 있는 유일한 입헌군주국으로 수도는 암만이다. 서아시아 문명 발달과 함께 교역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기원전 13세기부터 이집트인이 정착했으며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암몬인의 나라가 바로 요르단 암만이다.
암만은 요르단 강과 인접해 있어 기원전 5세기경부터 나바테아인들에 의해 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 2세가 도시를 재건했고, 그 후 로마·비잔틴 시대에는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기원전 1세기 페트라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국가가 형성됐으며 1세기에는 로마 제국에 합병됐다.
7세기엔 이슬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에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놓였다.
1923년 히쟈즈 왕국의 왕족 압둘라-빈 후세인을 영입하여 트란스 요르단 왕국을 세웠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50년 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지역을 영토에 추가하였으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기게 되었다. 중동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점령된 지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인이 유입됐다.

 

   
▲ 암만의 거리풍경은 수천년 역사에 걸맞게 로마시대와 헬레니즘, 이슬람이 공존하고 있다. 서방과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외국산 상품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아랍의 중재자 요르단

중동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나라가 요르단이다.
다른 국가와 달리 입국심사도 까다롭지 않다. 입국비자를 손쉽게 받을 수 있으며 나라의 국적을 따지지도 않는다. 한국의 경우 선진국이라는 인식이 강해 간단한 입국심사와 함께 비자를 받을수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항상 휘말리던 요르단은 지난 94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중동의 완충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다.
친서방 정책을 표방하는 압둘라2세 국왕이 지난 99년 취임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다른 중동국가와 달리 석유 등의 천연자원이 나지 않은 남한과 비슷한 크기의 작은 나라인 요르단으로서는 주변국과의 원만한 관계설정은 선택이 아닌 생존인 셈이다.
지금도 경제는 대부분 대외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연간 550만t의 원유를 절반 이상 무상으로 원조받던 이라크가 무너지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맞기도 했지만 대신 미국이 연간 5억~6억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계가 157만명으로 국민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이라크 난민도 50만명에 이른다. 일부 시민들이 국왕의 친서방정책에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나, 국왕의 통치권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 이곳 사람들은 이슬람 신도답게 기도시간이 되면 어디든 차를 세우고 알라에게 기도를 올린다.


●동서양 문화가 혼재된 암만성

 

   
▲ 암만성 가운데 위치한 헤라클레스 사원은 고대 로마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기둥이 잘 보존돼 있어 관광객들의 유명한 사진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암만은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성경상 랍바암몬으로 BC 1천200년경 암몬족의 수도였으며 그후 로마시대에는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데카폴리스 중의 하나로 번창하여 당시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랍바암몬시절 이스라엘 왕 다윗은 유부녀인 밧세바를 취하고 자신의 허물을 덮기 위해 충복이요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이곳 랍바암몬의 최전선으로 보내 죽게 만들기도 했다.
암만성 바로 아래에는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극장이 위치해 있다. AD 2세기에 건립되어 현재에도 주요 공연 등이 열리고 있는데 건축공법은 현대인에게도 어려운 정교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암만시의 중심지역에 위치한 암만성은 높은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암만성에서 내려다보는 암만의 구시가지는 고대 성터에서부터 이슬람사원까지 중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다. 지금도 암만성터 안에는 헤롯대왕이 헤라클레스에게 바친 신전 및 비잔틴식 정문이 서 있고, 물저장탱크 및 성곽 그리고 교회의 잔해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요르단 고고학 박물관에는 오랜 역사에 걸맞게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부터 나바테아 고대문명, 로마와 비잔틴, 헬레니즘, 여기에 이슬람 문화까지 혼재된 곳이 바로 요르단 암만인 셈이다.

 

   
▲ 암만성 내 위치한 우마이야 사원. 사원 바로 뒤편에는 식수를 저장할 수 있는 대형 수조가 있다.


요르단=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조태현·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취재협조=주레바논 한국대사관·주요르단 한국대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