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초승달 지역'을 따라서왕의 대로 위에 꽃핀 문명 요르단'1'페트라'잊혀진 왕국 나바테아를 생각하다


 

   
▲ 붉은 사막 속 붉은 바위를 깎아 만든 거대한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도시 페트라. 영화'인디아나 존스'의 촬영장소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양쪽에 솟아있는 수십미터 높이의 바위틈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붉은 빛에 휩싸인 페트라의 상징'알 카즈네(Al-Khasneh) 신전'을 볼 수 있다.

페트라의 역사는 구약 성서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장자(長子)인 에서의 땅이다. 에서는 동생 야곱의 꾐에 빠져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겼다. 장자권을 넘긴 에서는 유산 뿐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적통도 빼앗겼다. 적통을 빼앗긴 에서는 자원은 물론 기후조차 건조하여 쓸모없는 에돔 황야로 밀려났다. 기원전 12세기의 일이다. 페트라는 바로 에돔 황야에 붉은 사암으로 우뚝 선 거대한 협곡지대다.
기원전 6세기,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페트라에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유목민인 나바테아인들이 이주해 왔다. 이들은 상업적 재능이 뛰어난 민족이었다. 페트라가 당시 대상(隊商)들의 교역중심지가 될 수 있음도 간파했다. 그것은 파르티아와 인도 그리고 중국 등에서 오는 무역이 여러 갈래의 길을 통해 결국 페트라로 집결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트라 반경 100㎞ 이내에는 물이 없다. 물은 대상들에게 생명수다. 나바테아인들은 이런 생명수를 오직 페트라만이 제공할 수 있는 이점을 활용했다. 또한 교역대상 국가들이 가장 중시하는 최고의 상품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그 상품을 생산하는국가를 파악하여 수요와 공급을 조정함으로써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아라비아와 인도에서 구할 수 있는 향, 몰약, 향료, 양념 등과 중국의 비단 등을 싼 값으로 사서 이집트, 지중해 지역 국가들에게 비싼 가격으로 팔았다. 그들은 교역로를 따라 세력을 확장하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나바테아 왕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2세기경이었다.


페트라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150㎞ 지점에 있다. 페트라는 '바위' 또는 '반석'이란 뜻이다. 그래서인가. 페트라에 가까이 오자 갑자기 붉은색을 띤 거대한 바위산이 나타난다. 반경 4~5㎞의 협곡지대에 들어선 것이다. 1천350m의 아론 산을 필두로 웅장한 모습의 붉은 바위산들이 시크(Siq)라는 좁은 협곡 사이로 웅크리고 있다.
강렬한 사막의 햇살이 바위산을 내리쬐고 바위들은 저마다 회색, 붉은색, 검은색으로 자신의 색깔을 발산한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수직으로 교차하는 절벽 사이로 뱀처럼 이어진 길을 걸으면 푸른 창공은 손가락의 마디보다 작아 마치 지하세계를 걷는 듯하다. 사암의 바위산을 떡 주무르듯 깎아내어 만든 페트라의 하이라이트는 보물창고라는 뜻의 '알 카즈네'이다.
높이 43m, 너비 30m의 크기에 6개의 원형기둥이 받치고 있는 2층의 이 아름다운 건물은 오로지 자연 암석을 그대로 활용하여 정교하게 다듬고 파내서 만든 것이다. 이 건물은 나바테아인들의 뛰어난 예술적 풍모를 잘 보여주는 것이나 겉모습의 화려함과는 달리 왕의 영묘나 신전으로 사용되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곳에 왕의 보물이 들어있다는 전설을 듣고 지금의 이름으로 전해진 것이다. 기원전 1세기경 헬레니즘 양식으로 지어진 알 카즈네는 상업적인 거래는 물론 동서양의 문화가 함께 이동했던 당시의 세계에서 페트라가 국제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 페트라 안쪽에는 대신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신전들이 가득하다. 신전과 함께 이곳에는 대형 원형극장과 각종 상점, 주거지역까지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있다. 예전 사막을 건너온 카라반들의 수천마리 낙타들로 북적대던 이곳에 이제는 전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그러나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하던 페트라도 화려한 전성기는 100년에 불과했다. 서기 105년, 페트라는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춘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의 동진전략에 힘을 잃고 속주로 전락했다. 페트라가 로마에 합병되자 로마인들이 몰려들었다. 로마인들은 제일 먼저 돌을 다듬어 포장도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공중목욕탕을 지었다. 커다란 바위산을 통째로 깎아내어 야외극장도 만들었다. 마차를 탄 로마인들이 포장도로를 달려와 뜨거운 목욕으로 피로를 푼 다음, 야외극장에서 그들만을 위한 공연을 보며 제국의 특권을 마음껏 누렸으리라.
 

   
 

로마 제국은 해상교역로를 개척하여 동방과의 원활한 교역을 시도했다. 페트라는 급속히 쇠퇴했고 이후 육상교역로의 중심지는 북쪽에 위치한 팔미라와 알레포로 이동되었다. 그러던 6세기경, 이 지역을 휩쓴 지진은 페트라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고 사라진 역사가 되었다.
모두에게서 잊혀진 도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초였다. 스위스의 젊은 탐험가인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가던 중 페트라에 엄청난 고대유적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아랍인으로 변장하여 이 도시를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의 여행기를 통해 신비의 도시 페트라를 전 세계에 알렸다.


영국의 시인 존 윌리엄 버건은 페트라를 보고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노래했고, 유네스코는 1985년에 페트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페트라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1989년)의 촬영으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요르단 정부는 이 영화를 국민영화로 지정해서 오늘도 페트라를 알리는데 널리 활용하고 있다.
나바테아인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토록 번성한 왕국이었건만 어째서 그들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 것인가. 그래서 더더욱 페트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이기도 하다. 페트라는 현재까지 1/10밖에 발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르단 정부는 나바테아 왕국 페트라의 입장료를 11월부터 10만원으로 올렸다.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페트라를 보고 싶으면 그 정도는 내라는 배짱이다. 나바테아인들보다 더한 상술이 아닐 수 없다.


요르단=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조태현·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취재협조=주레바논 한국대사관·주요르단 한국대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