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초승달 지역을 따라서'2부 (5)'지식 소통의 제1언어'기원을 찾아서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최고의 발명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문자일 것이다. 문자를 통해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을 모두가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없었다면 지식의 대중화는 불가능했고 나아가 진일보한 문명의 창조 역시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상 수없이 많은 민족이 각자 필요한 언어를 만들었다. 하지만 문자로의 발전은 훨씬 적었다. 그리고 그 문자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많은 문자가 사라졌듯이 많은 역사가 사라졌다. 문자의 소멸은 곧 역사의 소멸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기록될 수 없었기 때문일 터이지만, 기록된 것이라도 해독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된 문자는 유효한 역사다. 발견되지 못하고 해독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쉼 없이 진행되는 한편, 끊임없이 발굴되는 것이기도 하다.
 

   
▲ 라타키아 연안에 위치한 우가리트 유적. 기원전 3천년전의 유적으로 대부분 2층 구조로 건설됐다. 19세기까지 잘 보전돼 오다가 20세기 프랑스 침입으로 인한 대형 화재로 2층 대부분이 소실됐다. 특히 이곳 도서관 유적지에서 발견된 페니키아 문자가 현재 전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의 기원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에서 남서쪽으로 50㎞를 넘게 달린다. 기원전 2천500년경 번성했던 고대 도시 에블라 유적지를 찾아간다. 황량한 벌판을 내리쬐는 강렬한 폭염은 모든 자연물을 무채색으로 만들어 놓는다. 보이는 것은 모두가 회색이고 은색이다. 급기야 선글라스가 없으면 세상은 온통 흰색이 될 듯하다. 에블라 유적지는 허허벌판의 야트막한 구릉에서 온몸으로 폭염을 관조하며 탐사팀을 맞이한다.
에블라는 고대 근동의 3대문화권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제국의 가운데 있었던 왕국이다. 메소포타미아지역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상류의 마리, 에마르를 지나 지중해 해안지대와 아나톨리아 지방과 교역을 했다. 광물, 직물, 목재 등을 수입하였는데 에블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이러한 국제교역의 중심지였다.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에블라 왕국은 문화의 중심지 역할도 담당하였다. 많은 민족이 왕래한 까닭에 다양한 신들이 존재했는데 그 수만도 450개에 달한다.
 

   
▲ 1960년대 이탈리아 젊은 고고학자에 의한 에블라 발견은 중동 고대사를 새로쓰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0년간 발굴작업을 벌인 끝에 대규모 점토판이 발견됐다. 기원전 3천년 전에 쓰여진 이 점토판은 사실상 지금까지 남아있기 불가능한 유물이지만 이곳에서 발생한 화재로 점포판이 구워져 도자기 형태로 수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것이다. 이 점토판으로 인해 이곳이 에블라이며, 하나의 왕국이었음이 증명됐다.

에블라 유적은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굴의 하나로 꼽힌다. 그 이유는 고대 중근동 아시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획기적인 유물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왕궁 문서 창고에서 쐐기문자로 기록된 1만5천개의 점토판의 발견은 당시 서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특히 이 점토판에 적힌 지명과 인물은 구약성서를 해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위대한 점토판이 근 5천년 동안 어떻게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었던 것일까.
기원전 2천250년경, 에블라는 정치적 상업적 라이벌인 마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주변국에게 조공을 받으며 화살촉과 같은 전쟁무기를 수출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카드왕조의 나람신 왕이 에블라를 점령하고 불태워버린다. 이때, 왕궁 문서 창고에 있던 점토판 문서가 뜨거운 열기로 단단하게 굳어지면서 사실상 도자기로 구워졌고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에블라 왕국은 한 줌의 재가 되는 불행을 당했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더 위대하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 우가리트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판은 알파벳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다마스쿠스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에블라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안도시 라타키아에도 기원전 2천년경의 도시국가인 우가리트 유적이 있다. 이곳은 에블라왕국의 항구도시 역할을 하였다. 마을의 농부가 밭을 갈다가 묻혀있는 석관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알려진 우가리트는 현재까지 80년간 발굴하였음에도 전체의 1/4정도만 알려졌다.
20여m 높이의 언덕에 오르자 직선도로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적이 널려있다. 90개의 방이 달린 왕궁, 대형 응접실과 연회장, 관공서, 수로와 우물, 물이나 포도주를 보관했을 돌 항아리 등이 보인다. 제일 높은 곳에는 두 개의 신전이 있는데, 바알신과 그의 아버지 다간신을 모신 곳이다.
우가리트 유적지가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최초의 알파벳이 발굴된 까닭이다. 이곳서 발굴된 쐐기문자는 기존의 쐐기문자들과 달랐다. 즉, 고대 언어가 하나의 뜻을 갖는 표의문자였던 것과는 다르게 28개의 자모체계를 갖춘 것이었다. 이는 당시 많은 민족과 언어가 사용되었던 관계로 국제적으로 공용될 수 있는 표음기호를 만들 필요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가리트 알파벳은 이후 후손인 페니키아인들에게 전해지고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와 유럽에 전달함으로써 오늘날의 알파벳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지식을 소통시키는 제1의 언어가 되었다.
우리는 배우기 쉽고 뛰어난 표현력을 가진 언어인 '한글'을 만든 민족이다. 그리고 어떤 국가적 시련 속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올곧게 지켜온 민족이다. 역사가 누누이 알려주고 있듯이 국가경쟁력이 강하면 세계인들은 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제 우리도 한글이 세계인의 공용어가 되도록 힘쓰자. 그리고 인천이 제일 먼저 나서자.
 

   
▲ 우가리트 알파벳(위)과 음가(아래).



시리아=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조태현·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점토판 통해 본 '3천500년 전 생활상'>

에블라와 우가리트는 각종 민족들이 왕래하는 국제무역의 중심지답게 종교도 개방되어 다신교체제를 유지했다. 문화도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 화폐는 은화를 사용했는데 은화 1제켈은 약 16.4그램이었다. 3천500년 전 사람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점토판을 통해서 당시의 사회상을 알아보자.
①여왕 아하트밀쿠는 최고의 권위자답게 상당히 고급스런 생활을 했다. 그녀는 어떤 물건에 관심을 가지고 소비생활을 했을까.
보석으로 만든 귀걸이 4세트, 금반지와 금팔찌세트, 황금트로피와 황금벨트, 다양한 색상의 비단 옷, 고급스런 디자인과 색상의 망토와 코트, 상아장식이 되어 있는 침대 3세트, 금으로 장식된 의자, 동으로 만든 횃불, 화장품 20세트 등이다. 소비수준이 이 정도라면 여왕의 일상용품인 그릇이나 병은 수없이 많았으리라.
②야시나루라는 중년의 신사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아들이 없는 것은 그에게서 가문이 끊기는 것이기에 특단의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것은 양자를 입양하는 것이다. 때마침 '일쿠야'라는 아주 맘에 드는 사내아이를 발견하고 이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양하길 원했다. 그는 왕에게 나아가 맹서했다. 일쿠야를 양아들로 맞이하여 정성껏 키울 것입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절대 이 서약을 파기하지 않으며, 만약 파기할 경우에는 100제켈의 은화를 지급하겠다고. 반대로 '일쿠야'도 서약했다. 양아버지를 평생 공경하고 잘 모시겠으며 만약 양아버지가 싫어 떠날 경우는 빈손으로 나가겠다고. 자신의 영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니 요즘보다도 더 모범적인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③노예거래도 성행했다. 노예를 사려면 400제켈의 은화가 필요했다. 은이 귀했던 당시를 고려하면 매우 비싼 금액이다. 명마의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좋은 말 한필 값은 200제켈이었다. 이에서도 보듯이 짐승인 말보다 못한 것이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