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동행르포


시각장애인은 서럽다. 잠깐 가까운 곳이라도 한 걸음 떼는데 여간 큰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점자블록이 깔리고 음성안내기가 설치됐지만 큰 도움이 못 된다. 지난달 29일 경인전철 1호선 주안역사에서 일어난 시각장애인 사망사고는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을 다시 한번 여실히 확인해줬다. 지난 3일 복지관에서 일한다는 이용조(49·시각장애 1급)씨의 출근길에 동행했다. 앞을 못보는 이씨는 '위험천만한' 출근길에서 여러 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 경인전철 부평역 지상 승강장. 바삐 오가는 행인들 틈에서 시각장애인은 갈 길을 잃는다. 최근 주안역 시각장애인 사망사고로 필수 편의시설 확충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오전 7시 10분 부평구 D아파트. 용조씨가 현관문을 열고 지팡이를 짚는다.
익숙하게 승강기를 탄 후 아파트 정문을 거쳐 거리로 나서는 용조씨는 어린 시절 원인 모를 병을 앓은 뒤 시력을 잃었다.
 

   
▲ 버스를 타려고 인도 턱을 조심스레 내려서는 시각장애인 이용조씨.

40년 넘게 앞을 못보고 살아온 그에게도 길거리 걷는 일은 쉽지 않다. 집에서 전철역까지는 700m 가량. 2차로 도로 옆 인도에 점자블록이 이어지지만 그는 그 위를 걷지 않는다. 점자블록을 차량진입 방지석이 가로막는 경우가 많아 걸려 넘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골목길이 교차하는 곳에선 더 조심스럽다. 골목에서 차가 급히 나오면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차가 없다는 걸 귀로 거듭 확인한 뒤에야 그는 횡단보도도 없는 찻길을 건너 전철역에 도착했다. 보통사람이면 10분 걸을 거리를 20분 가까이 걸었다.
인천지하철 1호선 부평시장역. 용조씨는 여전히 점자블록을 피해 곧바로 승강장으로 향한다. 점자블록을 찾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그걸 따라가면 멀리 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길잡이가 돼야 할 점자안내판은 역에서 좀체 찾기 힘들다.
용조씨는 부평역에서 경인전철 1호선으로 갈아탄다. 계단을 올라 승강장에 도착하자 그는 한 걸음도 못 뗀 채 가만히 서 있는다. 이곳은 전철이 양 쪽에서 오가는 승강장이다. 그는 "전철이 한 쪽에서 오고 다른 쪽은 벽면이면 벽을 짚고 걷는데 이렇게 양 쪽에서 전철이 올 때엔 방향을 종잡기 힘들다"고 말했다. 걷다 보면 한 쪽으로 치우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철로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 시각장애인이 승강장에서 떨어지는 사고는 십중팔구 이렇게 일어난다. 용조씨는 이런 역일수록 스크린도어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전철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문이 안 열리니 적어도 떨어질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복지관 동료가 오고 난 뒤에야 전동차 안으로 살얼음 걷듯 발을 뗐다.
주안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나가면서도 시각장애인용 음성유도기는 전혀 쓰지 않는다. 복지관에서 준 리모컨을 누르면 역에 설치된 음성유도기가 방향을 알려주지만 거의 쓸모가 없다. 유도기에서 2~3m 만 떨어져도 리모컨이 말을 안듣고 유도기 숫자 자체가 적다. 차라리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나가는 것이 더 빠르다.
그래도 전철은 시각장애인이 타기에 그나마 좋은 대중교통 수단이다. 버스는 사정이 다르다. 언제 도착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긴장의 연속이다.
주안역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5분. 약시를 가진 동료는 어떤 버스가 오는지 안보여 애를 먹는다. "예전엔 버스 번호가 크게 인쇄돼 잘 보였는데 디자인을 바꾼 새 버스들은 번호가 작아 잘 안보인다"며 씁쓸해 했다.
버스에 올라탄 용조씨는 버스카드 단말기를 더듬어 카드를 찍고 어렵사리 손잡이를 잡았다. 미리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보행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릴 곳에 정확히 내리는 것도 그에겐 만만치않은 일이다. 방송이 안들리거나 잘못 나오는 날엔 낭패를 겪는다. 결국 버스가 방향을 트는 횟수나 땅 높낮이를 기억하기도 한다. 그는 사람들 발소리를 듣고 내릴 준비를 한다.
버스에서 내린 그가 일터인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까지 가는 길에 횡단보도에 시각장애인용 음성안내기가 설치돼 있다. 버튼을 누르면 신호등이 녹색인지 빨강인지 알려준다. 용조씨는 "복지관에 가는 길이라 설치된 것 같다. 다른 횡단보도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일터에 도착한 시간은 9시 정각이다. 한 숨을 돌릴 틈도 없다. 막바로 일을 해야 한다. 한 복지관 회원의 집에 찾아가 컴퓨터를 고쳐야 하는데 차편이 문제다.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차는 장애인콜택시와 장애인심부름센터 차다. 하지만 쓰려는 사람보다 차가 적어 예약이 꽉 차 있고 오래 기다리는 일이 잦다.
다행히 이날은 5분 안에 배차됐다는 휴대전화 메시지가 왔다. "출퇴근시간에 차 막히는 것과 같아요. 오전 7~9시, 오후 6~8시엔 한 번에 차 잡기가 불가능해요.그럼 빈 차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죠."
15분 후에 온 심부름센터 차를 타고 용조씨는 시각장애인 부부 김준삼(59·가명), 김경애(50·가명)씨의 집으로 향했다.
 

   
▲ 이용조씨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전봇대에 설치된 음성안내기를 만지고 있다.

1급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은 전철을 전혀 타지 못한다고 말했다. 몇 번 선로에 떨어졌다 아슬아슬하게 구조받은 경험을 겪고 나서 전철을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준삼씨는 "장애인은 전철 타는 게 공짜인데도 난 싫어. 잘못하면 사람 죽는거라. 누가 구해줬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저짝(저 세상)으로 갔을 걸"하며 한숨을 쉬었다.
경애씨도 지하철 생각만 하면 치를 떤다. "음성유도기가 있으면 뭐해. 얼마 없으니까 사용을 잘 못하지. 음성안내가 나와도 전철 소리에 묻혀서 잘 안들릴 때가 많아. 눈 보이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그렇지 뭐."
이 부부는 거의 종일 집 안에 있는다. 어데 갈 일이 있으면 심부름센터 차량을 부른다.
지하철에 음성유도기가 5m 터울로 설치되고 스크린도어가 생기면 이들은 마음껏 집 바깥을 나와 지하철을 탈 수 있을까. 모든 버스정류장에 버스도착 현황을 음성으로 안내해주는 장치가 달리면 이들은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용조씨는 헤어지기 전 "장애를 가진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의 무관심과 부족한 시설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은 또 다른 장애를 얻는 셈"이라고 말했다.
/글=유예은기자·사진=박영권기자 yum@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