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속 벅찬 느낌 붉은색 즐겨 표현
15일까지 연정갤러리서 20여점 전시
수십년동안 놓았던 붓을 다시 잡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순이 넘어서다. 계기는 외부로부터 왔다. 갑자기 쓰러진 후 한방울의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잡은 것이 붓이다. 24시간 그림을 그렸다. 살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났을까. 하고 싶은 대로 작업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다. 완성한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를 폈다. 개인전을 연 지 30여년만이었다. 그리고 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또 다시 개인전을 들고 나타났다. 흰 머리 성성한 유재민(68) 화백이야기다. '산의 메아리'라는 타이틀을 걸고 지난 1일부터 15일까지 옥련여고 연정갤러리를 작품으로 채우고 있다.

#. 그림으로 삶을 찾다
유 화백에게 그림은 '모든 것'이다. 좋아했던 그림을 드디어 원 없이 실컷 그려나가고 있다.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개인전은 작업의 결과인 것이다.
개인전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청·장년 젊은 작가로서의 과거와 원로 작가로서의 현재로 대별된다.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는 자라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미술교사로, 작가로 활동한다. 미술공부를 더하기 위해 나홀로 일본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화가는 그림보다 생활을 택해야 했다. 어느새 개인전 다섯번이라는 경력을 쌓은 연후다.
주변에서 화가보다 사업가로 기억해주는 이들이 많아졌다. 잘나가던 그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부도를 맞는다. 충격을 견디지 못해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 때 그에게 다가온 한줄기 빛이 아내가 챙겨준 캔버스와 붓이었다. 일어설 수조차 없어 엎드려 작업을 했다. 그후 10여년, 당당히 작가로서 전시를 열었다. 지난해 8월 일이다.
"화가로서 이름을 내세운 때가 아득한 과거였습니다. 다시금 활동하는 것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온 시간을 그림에 쏟을 수 있는 지금 더 없이 행복합니다."

#. 심상의 산을 옮기다
"지난해 개인전 후 연정갤러리로부터 전시 제안을 받았습니다. 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데 마음이 끌렸습니다." 젊어서 교단에 섰던 유 화백이다. 가르쳤던 제자가 어느덧 화단의 큰 인물이 됐다. 처음 그림에 관심을 갖은 것도 초등학교 시절 담임교사의 칭찬에서 연유했다. 이번 전시에 애정이 더 가는 이유는 그래서다.
대학 시절 전공이 유화다. 다시 잡은 것은 수채화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유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화와 수채화를 더해 20여점을 걸었다.
전시 타이틀이 '산의 메아리'다. 역시나 작품마다 산이 중심에 있다.
"나에게 산은 아주 중요합니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산행이 이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됐습니다. 산의 소리가 참 좋습니다. 산에게 말을 걸면 대답이 돌아오지요. 어느새 산과 내가 일치됨을 느낍니다. 그 느낌을 화폭에 담고 싶었습니다."
화폭 가득 산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안에는 계곡이 있고 물이 있고 바위가 있다. 화백은 자신만의 산을 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해서 완성된 작품은 구상보다 추상에 가깝다.
작업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작업실 밖에서 시작한다. 캔버스를 눕혀놓고 물감을 뿌린다. 스프레이를 사용하기도 한다. 수많은 점들은 모이고 흩어지며 비정형적으로 무늬를 만들어낸다. 진행된 연후 이번엔 캔버스를 세워 무늬의 변화를 증폭시킨다.
"밑작업 과정이 재미 있습니다. 때로는 의도대로, 때로는 예상을 넘어선 얻음이 있지요."
2~3일 말린 후 작업실로 옮겨간다. "이제부턴 어떤 산을 어떻게 얹느냐가 고민입니다. 고통은 없습니다.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거든요."
보통의 캔버스 대신 사포를 쓰는 것이 특별하다. 젊어서부터 사용해온 재료다. 작업하는 질감이 좋다고 말한다.
그림의 특징이 또 있다. 색에 관한한 붉음을 선호한다. "산에서 받은 벅찬 느낌을 옮기다보니 붉은 색을 고르게 됐습니다."
하나 더, 대작을 선호한다. 가슴속 이야기를 담기에 화폭은 한없이 좁기만 하다.
해서 결과는 힘과 붉음, 비정형성으로 요약된다.

#. 부족함을 넘어서기 위해
뭔가 부족함이 있다고 느끼고 있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누리고 있는 삶이 고맙고 고맙지요. 사실 관람객보다는 내 만족을 위해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덜 한 지점이 있습니다. 느낌을 전부 옮기는 데 미달이라는 거지요. 뛰어넘어야 할 단계입니다."
화가마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이가 있을까. 그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절실히 느끼고 있느냐는 것이다.
"작품을 해석하는 몫은 당연히 관람자에 있습니다. 완벽함에 대한 평가도 관람자에 의해서지요. 그 부분을 침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구요. 화가로서 하려고 하는 만큼은 이유불문하고 할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을 위해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작업실로 향하는 화백이다. 작업하러 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즐겁다고 재차 말한다.
/김경수기자 kks@itimes.co.kr